장기매매당할뻔한 김군
얼마 전 부산에서 장기 밀매단이 경찰에 적발됐습니다.
주로 신용불량자나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들었고, 밀매단은 이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해 장기밀매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른 채 이들의 표적이 된 10대 소년이 3명 있었다. 19살인 김 모 군과 또 다른 두 형제입니다.
공통점은 모두 부모를 잃고 혼자라는 것. 이들은 어쩌다 이 무시무시한 장기 밀매단의 표적이 되었을까요?
2580이 만난 김 군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 하고 전교회장으로 텔레비전에 출연까지 했던 모범생.
아버지가 주유소를 5개나 운영했을 정도로 가정 환경도 유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자살하고, 이후 어머니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모든 게 뒤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김 군의 기막힌 사연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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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장기 밀매 조직 25명이 한꺼번에 체포됐습니다.
화장실에 모집 스티커를 붙여 장기 팔 사람을 모았습니다.
[장기밀매 조직 통화 녹음]
"모집책:그때 그 금액이 정확하게 간이 2억 맞고 총책: 신장이 1억 5천 모집책: 신장이 1억 5천 맞죠?"
22명이 장기를 팔겠다며 모였고 16명은 장기 이식을 위한 건강검진까지 마쳤습니다.
다행히 장기 적출 전에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었고 조직 일당이 모두 검거됐습니다.
[김종호 형사과장/부산 해운대 경찰서]
"(폭력배가) 전국적인 장기 밀매 조직에 가담된 사실을 확인하고 수사에 착수하여 이번 사건을 일망타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10대 고아 세 명을 납치해 몰래 장기를 빼낼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사람.
하지만 젊고 건강한 사람.
장기 밀매 조직은 이런 사람을 찾았고 10대 고아 세 명에게 접근했습니다.
이 고아들은 어쩌다 장기 밀매 조직에게 걸려들게 된 걸까요?
"안녕하세요.."
장기를 적출당할 뻔했던 18살 김 모 군을 그가 사는 부산의 한 고시원에서 만났습니다.
끔찍한 일을 겪은 것 답지 않게 차분했습니다.
김 군은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김 군은 부산의 한 화목한 가정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 군의 부모님은 자상했지만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그 누구보다 엄격했다고 합니다.
[김 OO/18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을 말해보라고 하면 아버지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을 얘기해보라고 해도 아버지고. 진짜 엄하실 때는 진짜 너무 무서운데 착하게 잘 해주실 때 진짜 자상하시고.."
김 군은 성실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김 OO/18세]
"전교 등수로 쭉 놀고... 특히 영어 같은 거는 태어나서 영어시험이라고 쳐서 백 점 안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공부하는 거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편이었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했던 공부.
전교회장이었던 김 군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학생 대표로 인터뷰도 했습니다.
[김 OO/초등학교 6학년 당시(부산교육뉴스/2009년 7월 29일 방송)]
"내용 중심 영어 단어 시험에서 받은 달란트를 이용하여 물건을 살 수 있으니까 좋고 또 영어로만 대화를 하면서 물건을 사다 보니까 영어실력도 점점 늘어나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 사업까지 잘 돼 김 군은 남부러울 게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김 OO/18세]
"솔직히 저희 나이 때 애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잘 살긴 했었어요. 주유소를 다섯 개 운영을 하셨을 거예요."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면서 그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11년 11월 30일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김 OO/18세]
"머리가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멍하니 그냥 3일 동안 있다가, 할 얘기 있으면 지금 하세요 하는데 그때 진짜 아차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그거 한 마디 하고 그다음부터는 말을 못했어요. 계속 울었어요. 뭐라 말을 못 할 정도로 계속 울었어요."
50평대 아파트에서 살던 김 군과 어머니는 허름한 아파트로 옮겼고 김 군은 학교마저 그만둬야 했습니다.
친정 오빠에게 간 이식을 해줬던 김 군의 어머니는 계속 후유증을 앓아 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제대로 치료를 못 받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김 군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15살의 나이에 하루에 16시간씩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김 OO/18세]
"9시 반쯤에 일어났다가 1시 반이나 2시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고 그 뒤에 고깃집 같은 곳을 가서 한 9시 반 그쯤까지 일하고 퇴근해서 칵테일 바 같은 거 거기서 서빙 같은 거 새벽 2시쯤까지 하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로만 매달 200에서 250만 원의 돈을 벌었습니다.
[김 OO/18세]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해봤어요. 내가 이걸 안 하면 어머니는 죽잖아요. 치료비도 내야 되고, 월세도 내야 되고, 관리비도 내야 되고 식비 뭐 교통비 다 대야 되니까."
하지만 이런 김 군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두 번째 기일이던 2013년 11월 30일.
어머니마저 아파트 6층에서 몸을 던진 겁니다.
[김 OO/18세]
"덮어놓은 천 같은 걸 싹 치웠는데 얼굴 보고도 어머니인 걸 안 믿었거든요. 믿기 싫으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입으시던 티 나 아니면 막 뭐 잠옷 바지나 어머니 늘 신으시던 슬리퍼랑 인정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진짜 인정하기 싫었거든요. 그때는. 계속 아니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어디 다른 데 진짜 엄마가 있을까 봐. 이 사람이 우리 엄마 아니라고 하면 집이나 어디 딱 가면 진짜 우리 엄마 있을 것 같고.."
김 군은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세 차례 세상을 버릴 시도까지 했습니다.
[김 OO/18세]
"하루 하루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길만 걷다가 춥기만 해도 엄마 생각이 나고.. 혼자 밥 차려 먹을 때도 생각 들고.. 나도 죽을까 이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김 군은 쪽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7남매, 어머니는 3남매의 막내였지만 손을 내민 친척은 없었습니다.
[김 OO/18세]
"친척 분들 중에 한 분이 진짜로 평상시에 잘해주셨던 분이라서 '뭐 하세요?'라고 문자를 보냈거든요. 그냥 안부 물어보려고. 그랬더니 뭐 한다 이런 것도 아니고 '돈 같은 거 필요하면 남한테 기대려고 하지 말고 네가 노력을 해서 벌어서 쓰라'고 이렇게 답장이 왔데요. 갑자기. 되게 황당했었어요. 충격을 많이 받았었죠."
갈 곳 없는 김 군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장기 밀매 조직은 솔깃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장기 밀매 조직에 김 군을 팔아넘긴 사람은 그의 친구였습니다.
지난 8월, 김 군은 지내던 쪽방에서 쫓겨났습니다.
놀러 온 친구들이 시끄럽게 굴었다는 이유였습니다.
[김 OO/18세]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절대 (친구들) 안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아 시끄럽다고 다 나가라고. 3일 준다면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SNS에다가 '혹시 한 며칠만이라도 지낼 데가 어디 없겠느냐'라고 글을 올렸는데.."
친한 친구 이 모 군이 빈 집이 있다며 와서 지내라고 알려왔고 김 군은 평소 알고 지내던 또 다른 고아 형제 두 명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지냈습니다.
친구는 일자리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김 OO/18세]
"부산 이런 데 보다는 수도권 쪽이 좀 더 많이 쳐주고 하니까 '서울 쪽 이쪽 가서 배달 일 좀 하고, 돈 좀 벌어올래?' 하기에 바로 한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 군은 장기 매매 조직의 모집책이었고, 김 군을 서울의 장기 매매 조직 총책에게 넘길 계획이었습니다.
[김종두 경사/해운대 경찰서 강력팀]
"죄책감도 별로 없고 단순히 돈 때문에 오히려 고아인 친구를 뭐 잘 됐다고 생각하고 범행을 저지른 것 같아요."
서울에서 하기로 했던 배달 일도 실은 마약 운반이었던 걸로 경찰 수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울 갈 날만 기다리던 김 군은 장기 밀매단이 검거된 뒤 경찰에게 사건의 전 모를 전해 들었지만 여전히 친구의 배신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OO/18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세 손가락 안에는 적어도 드는 것 같아요. 제가 직접 귀로 걔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어야 되겠어요."
고아라는 처지 때문에 납치돼 목숨마저 빼앗길 뻔한 한 김 군.
[김 OO/18세]
"솔직히 누가 주인 있는 목장의 소를 몰래 가지고 가서 팔겠어요. 그냥 길거리에 주인 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소가 데리고 가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이해는 해요. 제가 뭐 제가 봐도 타깃이 될 만하니까 제 사정 자체가.."
나락의 끝에서 다시 나락으로.. 여기가 바닥인가 하면 더 깊은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사이 우리의 사회안전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 했습니다.
정부는 고아들이 고아원이나, 4~5명이 함께 지내는 그룹 홈, 또는 돌봐주겠다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가정 위탁, 이 세 가지 중 원하는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 군은 고아원에 들어가길 거부했고 그걸로 모든 게 끝이었습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
"아동이 가기 싫다고 하면은 강제로 어떻게 (보육 시설에)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죠."
[정익중 교수/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아이의 의견을 물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이가 혼자서 산다고 했을 때 그걸 용인하는 게 맞는 거냐. 이거는 조금 생각해 봐야 될 그런 문제인 것 같아요."
만 18살이 되면 지자체가 주는 주거정착지원금도 김 군처럼 고아원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받을 수 없습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
"(고아원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지원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 거겠죠. 다른 특별한 지원은 제가 지금 생각하는 바로는 없는데요."
기초 생활수급비 48만 원이 현재 김 군의 유일한 고정 수입.
고시원 월세 25만 원과 휴대전화비 5만 원을 뺀 18만 원이 그의 생계비입니다.
[김 OO/18세]
"(굶은 적이 있어요? 돈이 없어서?)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죠. 엄청 많아요. 하루에 한 끼 먹을 때는 다반사였고.."
한때 78kg이었던 그의 몸무게는 지금 55kg입니다.
기름진 음식을 거의 소화시키지 못하고 가끔 서있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지만 그의 정확한 건강 상태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 군은 충격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최근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자활센터에 다니며 삶의 의지를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김 OO/18세]
"몸은 힘들어도 돼요. 일하고 들어와서 갔다 왔다고 네네 하는 가족 한 명. 이렇게 해서 소소하게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많은 행복은 솔직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지난 30일은 부모님의 기일이었습니다.
김 군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린 곳을 찾았습니다.
나무에 묶여 있는 빨간 줄이 유일한 표시.
납골당에 모실 형편도 안 돼 어머니의 고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유골을 뿌렸습니다.
[김 OO/18세]
"(엄마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차라리 제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못 듣고 못 봤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부모님이 없어 가지고 (제가) 막 힘들어하는 거 보면 부모님이 어떻게 할지 대충 상상이 가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보셨으면 좋겠고.. 그런데 만약에 듣고 계시다고 치면 살아계셨을 때 그 정도 신경 써주셨으면 됐으니까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다시 만날 수 없는 거 그냥 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둘이 잘 지내라고.."
둘봐주는 사람 없이 어떻게든 살기 위해 버둥거리면서도, 어른들이 쳐논 장기밀매의 덫에까지 내몰리면서도, 김 군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변에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있다면 조금만 더 신경 써 달라고 했습니다.
[김 OO/18세]
"저 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저 혼자일리는 없잖아요. 모르고 넘어가는 약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거니까. 조금 더 신경 써 주셨으면 솔직히 고맙겠고 다들 바쁘시겠지만. 못 사는 사람도 사람이잖아요. 잘 사는 사람만 사람 아니고. 살아 있잖아요. 저보다 조금 더 내성적이고 분명히 주눅 들고 기죽어 사는 애들 있을 거예요. 진짜로 기죽지 말고 주눅 들지 말라고. 우리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런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를 달고 태어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 절대로 기죽지 말라고 하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