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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해설가 하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야구계 뿐만 아니라 네티즌들 역시 애도를 표했다. 8일 오전 하일성이 송파구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살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야구계는 슬픔에 잠겼다.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은 하일성과 오랫동안 쌓아왔던 인연을 언급하며 "지금 야구계에 그만한 인재가 있나. 활동적인 모습으로 야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었다"라며 "세계대회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했다. KBO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도 마운드 높이 조정, 룰 개정 등 야구인 출신다운 변화를 줬다"고 그의 업적을 칭찬했다. 이어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은 "내가 고교 3학년, 하일성 전 총장이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긴 인연으로 여러 일을 함께 겪었는데"라고 말했으며,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충격적이다. 최근 야구계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라며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야구계뿐만 아니라 네티즌들 역시 추모의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태X은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정도의 쉽고 논리 있게 참으로 해설 잘해주셨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이는 "하일성 해설위원님 말년에 정말 안타깝네요. 편히 쉬십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남기며 그를 추모했다. ![]() 한편, 8일(오늘) 경기가 열리는 5개 구장 모두 전광판을 통해 故 하일성 해설위원에 대한 추모글을 띄우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
경찰은 현장에서 타살 혐의점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가족과 지인을 상대로 숨진 경위를 조사 중이다. 또 사기 혐의 등으로 피소된 것이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여부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양평 소재 전원주택 부지가 부채 등으로 경매에 나왔고 돈을 빌린 뒤 갚지 않는 혐의(사기) 등으로 불구속 입건 돼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수 년 전에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자신의 명의로 된 100억 원 대 빌딩을 날리며 비극이 시작됐다. 최근에는 야구계에 발을 끊고 두문불출하다 부인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차마 발송하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난 하 전총장은 성동고등학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경희대 체육학과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한 뒤 베트남전 참전 이후 야구선수 생활의 꿈을 접었다. 졸업 후 경기도 김포 양곡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재임하던 1976년 동양방송(TBC)을 통해 해설계에 입문했다. 한화 김성근 감독은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고교야구 경기를 세 번인가 중계했다. 방송 도중 일본어를 몇 차례 쓴 게 문제가 돼 경질됐는데 그 후임이 하 전총장이었다. 하 전총장과 술자리를 하면 ‘이 형님 덕분에 내가 해설을 하게 됐다’며 껄껄 웃었던 기억이 난다”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KBS 배구 해설위원이던 오관영씨의 권유로 김 감독의 뒤를 이어 시작한 해설은 고인이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천직으로 여겼던 직업이다. 1982년 KBS 스포츠국 야구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프로야구 개막과 동시에 구수한 입담을 과시하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야구 몰라요” “역으로 가네요” 등 촌철살인의 멘트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과감한 직감해설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프로야구 해설가를 하나의 직업으로 격상시킨 개척자였다.
승승장구하던 하 전총장은 2002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세 차례 수술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복귀했다. ‘재기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한 하 전총장은 2006년 5월부터 2009년 3월까지 마이크를 잠시 내려놓고 제 11대 KBO 사무총장으로 프로야구의 한 가운데로 진출했다. 2007년 연말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으로 해체를 선언하자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서울 히어로즈 창단을 유도,8개구단 체제 존속에 기여했다. 당시 하 전총장은 “한국 프로야구가 1000만 관중 시대를 향해 뻗어가려면 리그 확장이 불가피하다. 현대가 야구계를 떠났지만 8개구단 체제가 존속돼야만 9구단 10구단이 탄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헐값에 구단을 넘겼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하 전총장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10구단 시대도 요원했을 것이라는 게 야구계의 시각이다.
사무총장시절 국제대회에서 뚜렷한 성과를 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신화 직후 사무총장에 선임된 하 전총장은 “굵직한 국제대회에는 반드시 최정예로 대표팀을 구축해 세계 4강 이상 성적을 내야 한다. 국제대회 성적은 국내 리그 흥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하 전총장이 생전 “가장 가치있는 기억이다. 내가 죽으면 비석에 ‘올림픽 금메달 단장’이라고 새길 것”이라며 뿌듯해 한 장면이다. 이후 국가대표 상비군제도를 도입해 2009년 WBC 준우승의 초석을 마련해 한국 프로야구 중흥기를 이끈 주역으로 손꼽힌다.
2009년 3월 사무총장에서 해임된 하 전총장은 ‘천직’인 해설위원으로 복귀했지만 2014시즌 후 하차했다. 사무총장시절부터 그를 둘러싼 수 많은 루머가 돌아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최근까지도 일본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재기의 꿈을 놓지 않았지만 잇따른 구설수로 순탄치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 전총장의 50년 지기인 KBO 김인식 기술·규칙 위원장은 “늘 밝고 쾌활한 친구라 내가 많은 위로를 받았다. 유쾌한 해설을 좋아하는 팬도 많지 않았나. 최근에는 어려운 일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1월에 개인적으로 통화를 한 번 한 후 연락이 없었다. 아직 믿기지 않는다”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한화 김성근 감독 역시 “세상살이 결국은 혼자다. 우리한테 말 못할 사연도 있었던 모양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KBO는 이날 열린 KBO리그 5경기에 앞서 전광판에 추모글을 띄우고 묵념하는 시간을 가지며 고인을 애도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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