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도 있다.

주역에 빠진 천재

얼 골 2018. 12. 19. 15:45

현대 과학을 보면 과연 인간이 알지 못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최첨단 수준의 과학을 만들었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지각을 총동원해도 이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다. 인간의 이해력은 안타깝게도 발전한 과학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과학의 월등한 진보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완전히 추월해 버리고 말았다. 과학은 소립자의 그림자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정작 인간은 소립자가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

1982년 내가 서울 장안동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인간의 유전자 정보가 들어 있는 디엔에이(DNA)가 이슈가 되고 있었다. 어느 날 DNA에 관한 연구를 살피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유전자의 암호와 주역의 구조가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순간 눈앞에 숫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2, 3, 4, 6’ 신기하게도 주역도 64괘, DNA도 64개로 이루어져 있다. 유전암호도 3개의 염기조합으로 형성되며, 주역의 8괘도 3개의 효로 이루어진다. DNA와 주역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한 뒤 나 혼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역을 깊게 공부하고 있었던 터라 DNA와 주역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불현듯 공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떨어져 ‘위편삼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으셨다. 그런 공자께서 주역을 지천명이 돼서 읽으라고 하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지천명 나이인 50세면 지금으로 따지면 80세 즈음이니, 인생의 풍상을 모두 겪은 황혼기에나 주역을 읽으라고 당부하신 셈이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내 주위에서 주역에 빠진 천재들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을 목격한 뒤로 왜 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장안동으로 나를 찾아온 K는 주역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의 명문 의대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 많았던 K는 수재들이나 들어가는 S대 화공과를 1등으로 입학했다. 합격 발표 당일 친구들이 그의 이름을 찾지 못해 “네 이름이 없어!”라고 하자 그는 여유 있게 웃으며 “난 1등으로 합격해서 맨 위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런 K가 어찌 된 일인지 주역에 빠지면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S대 화공과를 졸업했지만 취직도 하지 않은 채 주역 공부에만 몰두했다. 기술사 시험을 한 달 정도 공부해서 붙은 K는 친척이 경영하는 회사에 고문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다. K는 “내가 80%를 맞추는데 나머지 20%를 못 맞춘다. 딱 한 달이면 그 20%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도 못 풀고 있어”라며 답답해했다. 

나는 답답해하는 K에게 “DNA와 주역은 똑같은 암호야. 주역은 우주의 암호를 해석하고 DNA는 인간의 정보시스템을 밝히는 암호야”라고 했다. 그 말에 K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얼굴이 하얘지더니 “알았어”라고 짧게 말하고는 다시 주역을 공부하겠다며 가 버렸다. 그것이 K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금도 K를 생각하면 왜 공자께서 주역을 지천명의 나이에 읽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일본 헤이안 시대, 최고의 천재인 후지와라 요리나가가 호겐의 난에서 패배하자 주역의 괘에 따라 보은의 날, 37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주와 역학에 깊게 빠져 있던 나의 외사촌 형도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주역은 블랙홀과 같다. 지천명의 나이가 돼 주역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문득 과거 주역으로 만났던 인연들이 궁금해진다. 과연 K는 맞추지 못했던 20%의 비밀을 풀어냈을까.  차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