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가게 연 王(고종)의 화가… "실물과 다르면 환불"
입력 : 2012.04.24 00:25
[무관→고종 어진(御眞) 화가→초상화 사업… 근대 초상화 거장 채용신 展]
채용신만의 기법을 무기로 - 터럭 하나 안 빠뜨리는 전통 기법에 서양화 기법 응용, 명암까지 뚜렷이
호남 유지들 초상화 시장 싹쓸이 - "사진과 똑같이 초상화 그리겠다"
사진관 하는 아들·며느리 동원, 사진 없으면 '출장 촬영 서비스'도
- 채용신
◇독학으로 고종의 초상화가가 되다
1900년 선원전(璿源殿·어진을 모신 궁전) 중수를 결심한 고종은 선대의 어진을 모사할 만한 화가를 찾는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자제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22세에 부친과 친분이 있던 대원군 초상을 그려 이름을 떨친 채용신이 물망에 오른다. 고종의 부름을 받은 채용신은 당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조석진과 함께 태조(太祖) 어진을 성공적으로 모사해 고종의 신임을 받는다. 이듬해엔 고종 어진을 그리면서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의 자리에 올랐다.
채용신은 고종 어진 초본(草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진을 여러 번 모사했는데, 전시에는 원광대 박물관 소장 '고종황제 초상'이 나왔다. 터럭 하나까지 빠짐없이 묘사한 정밀함과 인물의 외양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고자 한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화법은 조선 초상화의 전통을 따랐지만, 화면을 가득 채워 인물을 그리고 정면관을 취한 점, 얼굴에 자잘한 붓질을 거듭해 명암을 뚜렷이 한 점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채용신 특유의 기법이다.
◇대가의 붓끝이 기록한 지방 양반의 얼굴
이번 전시엔 '운낭자상' 등의 대표작은 빠졌지만 대신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전북지역 양반들의 얼굴을 대가(大家)의 붓끝을 통해 만나는 이색적인 재미가 있다.
- (사진 왼쪽)채용신의 1918년작‘허담 초상’. 원본의 얼굴 부분만 클로즈업한 모습이다. 형형한 눈빛과 얼굴의 주름, 눈썹과 수염, 의복의 성긴 올까지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진 오른쪽)원광대박물관에 소장된 채용신의‘고종황제 초상’. /전북도립미술관 제공
낙향 후 전북 익산 금마에서 '금마산방'을 운영하며 최익현을 비롯한 우국지사의 초상을 대거 제작했던 채용신은 1923년 정읍 신태인에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초상화 전문 공방(工房)을 열었다. 채용신이 아들·손자와 함께 운영한 이 공방의 가장 큰 특징은 '사진'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다는 것.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제작했을 때 실물과 닮지 않았을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홍보 문구를 내 걸었고, 초상화의 모델이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땐 공방 측에서 사진사를 보내 촬영하는 '출장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 모델이 직접 공방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초상화 제작 기간을 단축해 공방은 크게 번창했다. 작품가는 성장(盛裝)을 한 입상(立像)이 100원, 남녀 양복 반신상은 80원. 당시 쌀 한 말이 3.5원이었다. 현재 경매에서 채용신 초상화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전시에는 전북지역 가문에서 영정(影幀)으로 전해내려온 미공개작 네 점이 소개됐다. 그 중 한 점인 '허담(許淡) 초상'(1918)은 문관복 차림으로 왼손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들고 돗자리 위에 정좌한 지방 하급 관리를 그렸다. 양천 허씨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이 초상은 얼굴의 주름, 콧등의 사마귀, 눈썹과 수염의 흰 터럭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秀作).
이 밖에 '삼고초려(三顧草廬)' '적벽대전(赤壁大戰)' 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명장면을 묘사한 그림 등 채용신의 폭넓은 작업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이당 김은호, 조덕현을 비롯한 근·현대 작가들의 초상화가 전시에 나왔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조은정씨는 "그림과 사진의 미덕을 공유한 채용신은 근·현대 초상화를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063)290-6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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