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朴烈)
1902년 2월 3일 생 - 1974년 1월 17일 사망
박열의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으로 대한제국 말기의 경북 문경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3.1 운동 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그는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조선을 합병한 일본에 적의를 품고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가하여 의열단, 흑도회 등의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에 의한 조선인 학살사건을 체험한 그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을 획책하여 정부였던 일본인 여성인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체포되었는데 이어서 2년 후에 천황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박열사건)
이 사건은 당시 일본정부 당국의 과장도 있었지만 박열 자신도 스스로 대역죄를 인정하고 의병답게 행동했기에 다른 일본인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때문에 1926년에 사형판결이 내려졌지만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박열은 매우 격노하여 감형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는데 사형판결 직후 따로 수감되었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살했다. 결국 박열은 일본의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까지
감옥에서 생활을 보냈는데 옥중에서 무정부주의에서 반공주의로 사상을 전향했다.
전후 박열은 재일조선인 조직의 결성을 목적으로 1946년에 신 조선 건설동맹을 결성하는 위원장이 되어 10월 3일에
재일본 조선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초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1949년의 단장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해 실의에 빠진 박열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에서 박열은 북한군에게 의해 납북되었다. 그 후 북한의
남북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박열은 1974년에 평양에서 사망함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현재 문경에는
박열의 기념관이 건립중인데 그 옆에 가네코의 묘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