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이방자여사, 아들 이구

얼 골 2018. 5. 14. 18:48

여기서 잠깐 영친왕 이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구황실재산처리법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심지어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마저 (주일대표부 건물로 쓰기 위해) 국유라며 내놓으라고 우겼다. 뜻있는 일본 변호사 한 사람이 막대한 구황실 재산의 계승자인 영친왕에게 소송을 권했다.

"전하, 한국 정부에서 전하의 재산을 다 빼앗고 생계비도 드리지 않는 것은 법률 위반이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꼭 이깁니다. 재판을 거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변호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친왕은 잘라 말했다.

"선생의 호의는 고마우나 이것은 우리나라 내부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온갖 만행을 자행한 이승만의 후안무치한 행동에도 영친왕은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이방자여사,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와 며느리 줄리아.

이구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멀록(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한국명은 이주아)1959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에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집요한 귀국 방해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1958에서 1961에 미국 하와이에서 생활 하셨다.

 

4.19로 이승만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그는 이은에게 입국을 권유했다. 영친왕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여 민주당의 불안한 입지를 확고히 다지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눈치챈 이은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고 박정희 정부가 드러섰다. 당시 이은은 또다시 쓰러졌다. 병세는 매우 심각해서 그는 보행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부는 귀국 시 생활비 지원을 약속하며 이은부부의 귀국을 권유했다. 1963 11 22. 이은부부와 아들 이구를 실은 비행기가 도착했다. 반신불수의 몸이 된 이은은 귀국 하자마자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영친왕 이은은 7여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최소한 이승만 보다는 훌륭한 인격인 듯 ....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 1967, 언어장애인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 남편이 죽자 1971, 지적장애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에는 광명시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금혼식에서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 부부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시누이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 1989 4 30, 향년 88세를 일기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 5 8, 각계 인사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영양왕, 이은)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의민황태자(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영결식

일본인으로 태어나셨지만 한국인으로 살아가신 이방자 여사. 極樂往生을 기원합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영친왕과 이방자 황태자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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