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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토마'로 불린 사나이 바로 고정운(52)

얼 골 2018. 12. 14. 11:54
‘적토마’란 별명으로 그라운드를 휩쓸던 고정운은 이제 52살의 중년 축구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만의 무대에서 적토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박찬웅 기자)

-“몸싸움하다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몸 만들기 시작” 

- “건국대 정종덕 감독은 내게 ‘노력’이란 단어를 알려준 분”
- “박종환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 다행히 내게 맞았다”
- “지금도 잊을 수 없는 1995년 프로축구 챔피언결정전 3차전”
- “해외팀에서 오퍼 왔을 때 가지 못한 게 지금도 가장 큰 한”


기록이요? 전 그런 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신경도 안 썼고요. 몇 경기 출전했다, 언제 도움왕 됐다, 이런 게 제겐 큰 의미가 없더라고요. 선수 땐 그저 한 경기 한 경기에 뛰는 게 소중했거든요. 그때는 그랬어야할 시절이었고요. 그렇게 살다 보니 13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네요(웃음).      
국가대표 시절의 고정운(사진=대한축구협회)


어떤 운동을 하십니까.
 
아파트 뒤에 산이 있어요. 주로 산에 갑니다. 오늘은 오전에 비가 와서 아파트 계단을 왔다 갔다 했어요.
 
아파트 계단이요?
 
14층 계단을 16번씩 오르락내리락하니까 한 시간이 후딱 가더라고요.
 
‘적토마’란 별명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군요. 
 
52년을 살면서 늘 가슴에 품은 단어가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노력이에요. 사실 고교 때까진 지금처럼 몸이 좋질 않았어요.
 
축구팬들은 고정운을 ‘늘 다부지고, 건장했던 선수’로 기억하는데요.
 
그럴 거예요. 그런데 제 키가 177cm인데, 대학교 입학 때 몸무게가 63kg밖에 안 됐어요.
 
63kg이요? 
 
지금 독일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서 뛰는 이재성이나 이청용보다 더 말랐어요. 주변에서 "기량이 좋다"는 얘긴 종종 했는데 어떻게 된 게 연령별 대표에 한 번도 못 뽑혔어요(웃음). 동기들 가운데 잘하는 선수가 너무 많기도 했지만.
 
체격 때문에 떨어졌을 수도 있겠군요.
 
그런 이유도 있었겠죠. 
 
언제부터 몸을 만든 겁니까.
 
대학교 2학년 때부터요. 빨리 주전으로 뛸 기횔 얻고 싶어서 당시엔 축구부 수준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건국대에 입학했어요. 다행히 1학년 때 대학리그 첫 경기에 나갔는데, 전후반 90분 내내 상대팀 3, 4학년생들한테 계속 몸싸움에서 밀렸어요. 아예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떨어지기도 했다니까(웃음). 그걸 보시고 감독님께서 두 번째 경기부터 아예 날 엔트리에서 빼시더라고.
 
충격이 컸겠습니다.
 
고교와 대학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죠. '몸싸움과 체력이 좋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살을 찌우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살을 찌웠습니까.
 
당시 건국대에 운동부가 총 여덟 개였을 거예요. 여덟 개 운동부 동기들 만날 때마다 체중 늘리는 방법을 물었죠. 야구부는 맥주를 하루 한 캔씩 마시고 자라더라고(웃음). 날마다 라면에 초콜릿까지 먹고 자봤는데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럼 어떤 방법을 쓴 겁니까.
 
2학년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줄넘기를 했어요. 튜브를 몸에 달고 뛰기도 했죠. 웨이트 트레이닝도 엄청 열심히 했어요. 다른 선수들 음악다방 갈 때 전 보일러실 옆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했습니다. 거기가 제 아지트였어요(웃음). 결국 2년간 14kg을 찌웠어요. 78kg으로 건국대를 졸업했죠. 다른 팀 선수들이 절 보면 "누구지?" 할 정도였어요(웃음).
 
혼자 운동한 겁니까. 
 
황선홍 전 FC 서울 감독이 제 '방졸(룸메이트 후배)'이었어요. 날마다 황 감독 데리고 가서 함께 운동했죠. 황 감독이 자기 자서전에 제 얘길 썼더라고요. 아마 그땐 제가 많이 미웠을 거예요(웃음).
 
경기력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웬만한 몸싸움에선 절대 밀리지 않았어요. 스피드도 확실히 늘었죠. 연령별 대표에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다가 대학 2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대학 4학년 땐 춘계대회 우승하고, 대표팀에 뽑혔고. 1988년 서울올림픽 축구 대표팀 멤버로 뛰었죠. 
 
대학 데뷔전에서 몸싸움에서 밀린 게 지금의 '적토마'를 만든 거군요.
 
당시 건국대 사령탑이셨던 정종덕 감독님께 지금도 감사드려요. 정 감독님 만나고 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제게 '노력'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분도 정 감독님이세요. 건국대 입학 때 '대학선수 랭킹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던 제가 프로 신인왕을 탈 수 있던 것도 다 정 감독님이라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화 천마 시절 고정운(사진 가운데)은 1993시즌부터 1995시즌까지 팀의 3년 연속 우승을 도왔다(사진=일화)




1989년이었죠. 창단팀 일화에 '신인 우선 지명권'이 쥐어졌어요. 당시 좋은 선수를 다 데려갈 수 있었죠. 창단 멤버 48명이 박종환 초대 감독님 앞에 모였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지옥이 시작됐죠.

 
지옥이요?
 
박 감독님 스타일이 스파르타식이에요. 엄청난 훈련량에 선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죠. 선수끼리 경쟁도 엄청 시키셨어요(웃음). '100% 주전 보장'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결국 프로 데뷔해부터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프로 첫 경기, 첫 골, 첫 도움의 기억이 생생할 듯합니다.
 
이상하게 난 그런 걸 잘 기억 못 하겠더라고(웃음). 몇 경기 뛰었다, 몇 골 넣었다, 이런 게 제 기억엔 없어요. 그저 한 경기 한 경기 뛰는 게 소중했죠. 그렇게 뛰다 보니 13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는데. (잠시 생각하다가) 기억에 남는 시즌이 두 번 있긴 해요. 
 
언제입니까.
 
첫 우승했을 때인 1993시즌과 리그 3연속 우승했던 1995시즌이죠.

이유가 있습니까. 

 
신생팀 일화는 투자를 많이 하는 팀이 아니었어요. 1989시즌 신인왕 받았을 때 다음해 연봉이 얼마 올랐는지 아세요?
 
수천만 원은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에이, 아니에요. 300만 원 올랐어요(웃음). 아마 당시엔 리그 구단 중에서 일화 출전 수당, 승리 수당이 가장 적었을 거예요. 창단하고서 3, 4시즌은 선수들이 정말 힘들어했어요. 가뜩이나 그땐 지금처럼 에이전트 같은 건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해외 진출은 뭐 먼 나라 이야기였고. 구단이 풀어주지 않으면 팀을 나갈 방법이 없었어요. 뭐, 종신 계약이었죠(웃음).  
 
그런 일화가 1993시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박종환 감독님의 스파르타식 지도가 당시엔 먹혔어요. 지옥 훈련과 힘든 생활을 견뎌내다 보니 정신력에서 확실히 다른 팀을 앞섰어요. 정신력으로 우승했습니다(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감독님께서 '헝그리 정신'으로 무명 선수들을 잘 지도하셨던 것 같아요. 발레리 사리체프가 구(舊)소련에서 넘어와 골문을 지켜주면서 실점률이 확 떨어진 것도 우승의 비결이었어요.
            
일화 천마 시절 고정운(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일화)
 
선수들의 노력과 구단의 투자 덕분일까요. 1994, 1995시즌에도 연거푸 일화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5시즌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포항제철 아톰즈와 치렀던 ‘1995 하이트배 코리안리그 챔피언 결정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었던 챔피언 결정전을 3차전까지 끌고 갔던 그 경기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띄워줄 경기는 아니었고요(웃음). 기억에 많이 남긴 해요. 일화 홈이던 동대문구장에서 1차전을 치렀는데 포항과 1대 1로 비겼어요. 포항에서 2차전을 치렀는데.
 
2차전에선 황선홍이 2골을 넣어 포항이 일화에 2대 0으로 앞서 나갔습니다. 
 
맞아요. 패색이 짙었는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죠. 후반에 들어온 신태용이 만회 골과 동점 골을 넣어서 2대 2 동점을 만들었어요.
 
마무리는 지금 제 앞에 있는...
 
(크게 웃으며) 제가 신태용한테 크로스를 올렸는데, (신)태용이가 다시 제게 공을 주더라고요. 제가 마무리 지으면서 일화가 3대 2로 대역전승을 거뒀죠

하지만, 그 기쁨이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추가 시간에 포항 외국인 선수 라데에게 골을 먹어 3대 3으로 비겼어요. 제3 지역 안양으로 이동해 3차전을 치렀죠. 연장전에서 제가 크로스 올린 걸 (이)상윤이가 헤더로 넣어서 결국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어요.
 
크로스 올릴 때 이상윤을 보고 올린 겁니까.
 
뭘 봐 보긴(웃음). 상윤이가 위치 선정이 워낙 좋으니 '거기 있겠거니'하고 올린 거지(웃음). 상윤이가 해결할 거라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때 그 해외팀에 가지 못한 게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한이다.” 
 
‘적토마’ 고정운(사진=엠스플뉴스 박찬웅 기자)
 
3년 연속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120%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정도 헌신했다면 국외 진출을 노려볼 만도 했는데 .
 
사실 1995시즌보다 1994시즌 때 몸이 더 좋았어요. 그때 '유럽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마침 오퍼도 왔고. 
 
오퍼요? 거기가 어디였습니까.
 
해외리그에서 아주 유명한 팀이었어요.  그때 그 팀에 가지 못한 게 제 축구 인생에서 지금도 가장 큰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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