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부터 대거 모이기 시작해 마을 주민의 절반 가까이 고려인 한국말 배우는 고려인문화원 생겨 마을 곳곳 식료품점·식당들에는 러시아·중앙아시아의 풍토 섞여
함박마을에 고려인이 대거 모이기 시작한 시점은 2017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수도권 내 고려인 최대 밀집 지역은 ‘땟골’이라 불리는 경기 안산시 선부동이다. 이곳에는 2010년 만들어진 ‘고려인너머’라는 고려인지원 시민단체가 있다. 하지만 함박마을에 고려인이 지난 2년간 폭발적으로 늘면서 ‘고려인너머’의 도움으로 이곳에도 ‘고려인문화원’이 생겼다. 박 원장과 고려인 차 이고르씨(41)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고려인 밀집도가 높은 곳이다보니,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와 식당, 빵집이 거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에서, 1937년부터는 중앙아시아의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의 식문화엔 한민족의 전통과 함께 각 지역의 풍토가 녹아 있다.
월세 비싸도 보증금 없는 곳 많아 고려인들 모이는 데 긍정적 작용 아이들 안심하고 키울 수 있도록 자체 순찰대 만들고 가로등 설치 지난해 대비 범죄율 70% 낮아져
레표시카’는 러시아어로 납작하고 둥근 빵을 의미한다. 차 이고르씨에 따르면 이 빵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오비논’ 혹은 ‘바뜨논’으로 불린다. ‘레표시카’의 신 알렉산더씨(55)가 갈색 종이봉투에 빵을 하나 담아 내밀었다. 값을 치르려 하자 차 이고르씨가 말했다. “어른이 주시면 받는 거예요.” 신씨도 ‘그냥 가져가라’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차씨는 “어린 시절, 우즈베키스탄에서 시장에 가면 고려인 상인들이 고려인 아이들에게 초콜릿 같은 걸 그냥 주곤 했다”면서 “그때 ‘어른이 주시면 받는 거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며칠 후 ‘레표시카’를 또 찾았을 때에도 신씨는 “이 빵은 안 먹어봤지?” 하면서 다른 종류의 빵을 내밀었다. 신씨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조선말’을 조금 배웠다고 한다.
함박마을의 월세는 30만~45만원으로 그리 싼 편은 아니지만, 보증금이 없는 곳이 많다. 이런 조건이 고려인들이 모여드는 데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인천에서 오래 살아온 박 원장에 따르면 고려인 이전에는 이곳에 주로 중국동포, 중앙아시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다. 낯선 이들이 많은 탓에 한국인들은 함박마을에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고려인문화원에서는 고려인 20여명을 모아 자체적으로 ‘순찰대’를 만들었다. 매주 토요일 마을을 둘러보고 쓰레기를 줍는다. 연수구청에서도 컴컴한 골목에 가로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박 원장은 “고려인들에게 ‘마을에 범죄가 있으면 아이들도 안심하고 키울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면서 동네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함박마을 통장들은 지난주 모임을 갖고 박 원장을 초대해 ‘고려인의 역사’ 강의를 들었다. 차 이고르씨에 따르면 이곳 부동산중개소 사무실에서는 고려인 직원을 채용해 ‘통역’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고려인,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울려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조금씩 빛을 보고 있다. 최근 함박마을의 범죄율은 지난해 대비 70% 낮아졌다. 지난 20일 오후, 다시 찾은 함박마을 거리 한쪽에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했다. 긴 머리를 화려하게 땋은 아이를 내려준 어린이집 선생님은 아이 어머니에게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이 머리, 어머니가 해주신 거예요? 너무 예뻐요”라고 말을 건넸다. 한국말을 잘할 줄 모르는 여성은 수줍게 웃었다.
『<고려인 아버지의 삼촌·고모를 찾습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 도라지~”
지난 14일 경기도 안산 선부동의 카페 ‘우갈록’에서 만난 고려인 김엘라씨(63)는 한국어는 못하지만 아버지가 즐겨 부른 노래는 기억한다면서 ‘도라지 타령’의 한 소절을 불렀다. ‘우갈록’은 ‘모퉁이’라는 뜻으로 고려인 지원단체 <고려인 너머>에서 운영하는 카페다. 지난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한국에 온 엘라씨는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함께 입국한 딸 내외가 일하러 간 사이 손녀 둘을 돌보는 것도 그의 몫이다.
한국에 온 후 그는 농장에서 평생 고생만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졌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고향 얘기를 참 많이 했는데, 우리는 한국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그건 아버지 꿈에나 나오는 얘기지’ 하고 말았어요. 그때 자세히 적어놓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돼요”
그는 기자에게 아버지의 형제·자매를 찾고 싶다고 했다. 엘라씨는 아버지 김상니씨가 남겨놓은 메모를 갖고 있다. ‘19세 때 군대에 강제징집되었다가 러시아군으로 편입됐고 러시아에서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김상니씨가 우즈베키스탄 농장에서 일한 것은 1950년 즈음부터라고 한다.
“삼촌, 고모가 어디엔가 살 텐데 죽기 전에 보고 싶어요” 김엘라씨가 기자에게 보내온 그의 아버지 김상니씨의 사진과 출생지 등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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