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바람이 몰아쳐도 깊은 향기를 내뿜는 들판의 야생화 같은 분이셨어요.”
지난달 3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뒤늦게 열린 천경자 화백의 추모식장에서 그의 둘째 딸 김정희(61·미국 몽고메리 칼리지 교수)씨는 생전의 어머니를 그렇게 떠올렸다. 어릴 적 천 화백이 ‘미도파’란 애칭을 붙여주며 애지중지 키웠던 김씨는 고인의 그림 곳곳에 자주 등장하는 소녀상의 모델이었다.
한국의 프리다 칼로(멕시코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천경자 화백은 생전 “죽음은 인생 최후의 무대”라는 일본 원로작가 우메하라 류자부로의 경구를 마음에 떠올리곤 했다
1986년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일하면서 맡은 역을 멋지게 치러내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철학과 생활자세를 갖고 싶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노년에 들이닥친 병마와 유족간의 갈등 와중에서 온전히 실현되진 못했다. 98년 미국 뉴욕에 사는 맏딸 이혜선(70·섬유공예가)씨의 손에 이끌려 뉴욕의 딸 집으로 영영 떠난 뒤 스케치와 드로잉을 계속했지만,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으며 칩거 생활을 했고,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사실상 스스로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뒤 10여년 만에 맏딸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
전남 고흥 시골에서 화가의 꿈을 품고 유학하고, 두 사내를 만나 사랑하고, 버림받고, 아버지가 다른 자녀들을 거느리고, 화업과 가계를 함께 이끌어나갔던 그의 가족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인은 1924년 늦가을 밤 전남 고흥에서 군 서기였으나 도박에 탐닉했던 아버지 천성욱과 서화에 뛰어났던 어머니 박운아의 맏딸로 태어났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보면, 그가 태어난 곳은 하얀 오랑캐꽃이 애처롭게 핀 봉황산 자락에 있었다. ‘남도의 묘한 기후 때문인지 꽃도 많이 피고 미친놈, 미친년들이 많아 날 궂은 날이면 시부렁거리는 그들 소리가 동네길을 누벼 메아리쳐 귀에 아프게 들려왔’던 곳이었다. 수를 잘 놓고 묵화에도 능했던 예인 기질의 모친에게서 모유가 안 나와 연유나 사탕 넣은 미음을 먹었던 그에게 처음 눈에 비쳐온 풍경은 건넌뱅이 언니 등에 업혀 어느 집 사립문 속에 들어갈 때 시야를 온통 연분홍으로 덮어준 꽃나무였다고 한다.
‘옥자’란 이름을 붙여준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심청가’, ‘춘향가’ 창을 듣고 자란 어릴 적부터 보는 감각과 그리는 재질이 있어 대청마루 벽에 여인상을 그릴 정도로 일찍부터 그는 그림에 관심이 깊었다. 보통학교 시절 그의 소질을 발견한 일본인 담임의 격려로 화가의 꿈을 품게 된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 시집을 보내려는 부친에게 저항하며 다듬잇돌 위에 앉아 울다가 웃다가 광인 시위를 하면서 일본 유학을 결행한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후배 박래현 등과 동문수학하게 된 그는 당시 선호하던 양화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대로 섬세한 채색화를 가르치는 일본화 고등과로 진학해 사실적인 데생법과 채색법을 익히게 된다. 방학 시절 고향에 가서 병중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그린 <조부>, <노부>로 42, 43년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에 잇따라 입선하며 화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비교적 순탄한 듯했던 그의 화가 인생은 44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파란에 휩싸이는 운명을 맞는다. 도쿄에서 귀국 교통편을 구해준 일본 유학생 이철식과 44년 결혼하면서 첫딸 혜선과 첫아들 남훈을 낳았지만, 극심한 성격 차이로 곧장 헤어져야 했던 것이다.
뒤이어 그의 삶의 중반기까지 자신을 고뇌와 질곡에 몰아넣은 두번째 남자가 찾아온다. 전남 광주의 신문사 기자였던 김상호였다. 호걸 용모에 언변이 좋고 주위에 여인들이 많았던 그는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던 천 화백이 학교에서 열었던 46년 첫 개인전 때 만나 단박에 여심을 사로잡았다.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에 그와 열애하며 사실상 동거 생활에 들어갔고 아이까지 임신했지만, 그는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 다른 여인들과의 염문을 몰고 다니는 한량이었다.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뒤 수시로 폭언을 하고 변덕을 부리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그였지만, 아이까지 갖게 된 천 화백은 그를 한편으론 미워하면서도 사랑의 미련 때문에 마냥 헤어질 수 없었다. 그 뒤 한국전쟁이 터졌고 유일한 위안이었던 여동생 옥희마저 온몸에 퍼진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절망에 젖은 그는 하루라도 사는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광주 시내의 한 과붓집에 작업실을 꾸리고 역전 뱀집을 돌며 뱀을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집 사립문에 도사리던 능구렁이, 지붕에서 참새 새끼를 습격하느라 창공에 긴 몸뚱아리를 꿈틀거렸던 뱀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자신의 구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상상이 일어난 것이다. 뱀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성난 독사를 골똘히 스케치하며 두루마리에 부지런히 옮겼다. 51년 3월 결국 동생이 숨지고 그는 자신을 팽개친 뱀띠 남편 김상호에 대한 증오의 감정과 살겠다는 독기를 부려 넣어 저 유명한 뱀 35마리의 그림 <생태>를 완성했다
1951년 이 뱀 그림 <생태>를 처음 선보인 부산 국제구락부의 2회 개인전은 고달팠던 그의 작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징그러운 뱀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파가 밤 9시까지 전시장에 몰려왔다. 주머니에 뱀을 넣고 다닌다는 풍설도 돌았다. 혀를 날름거리는 35마리의 뱀이 똬리를 튼 덩어리를 통째로 보여주는 소재와 구도의 도발성에 화단에서는 혀를 내둘렀고 거장 김환기로부터 홍익대로 출강하라는 부탁이 왔다. 뒤이어 둘째 정희씨가 태어났다.
54년 홍익대 전임강사가 되어 서울 북촌에서 살림을 시작한 그는 본격적인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명동 문화거리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물고 막걸리를 기울이며 박인환, 이봉상, 한묵, 박고석 등의 예인들과도 교유를 했다. 55년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 <정>(靜)과 <결혼> 등 그의 화폭이 징글징글한 사실적 재현에서 좀더 환상적이면서 구슬픈 정서를 담은 소녀와 동물 그림으로 변화해갈 무렵 그사이 잊었던 남편 김상호가 다시 찾아와 온 가족이 서울 생활을 하게 됐다. 그사이 막내 쫑쫑이 종우가 태어났다. 나름 온가족이 모였지만, 남편 김상호는 본부인 외에도 다른 여인들과 외도를 일삼았다. 작가의 고향집까지 빼앗고는 잦은 잔소리와 폭언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천 화백은 회고했다. 가난하고 추운 집에서 ‘김상호 죽어라 죽어라’를 되뇌면서도 그는 남편이 떠나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결국 70년대 초반 유럽 남태평양 기행을 다녀온 뒤 집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천 화백은 남편과 영영 이별한다. 이런 미움 섞인 감정과는 별개로 그는 자서전에서 자식들에겐 호랑이처럼 원색적인 사랑을 베풀었다고 쓰고 있다. 밤에 경기를 앓는 후닷닷, 쫑쫑이를 업고 서울시내 병원을 헤맸던 일과 딸들의 명문학교 입학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는 구절들도 종종 보인다.
생전 천 화백은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인생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별을 쳐다본다고 술회하곤 했다. “옛날에 맺히게 가슴이 아플 때면 밤을 기다려 별을 쳐다보면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저 반짝이는 별 속에 인자하고 선한 영혼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지만 초음속으로 가깝게 다가와 고민을 씻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별이라도 믿어야 살 것 같다.”(<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418~419쪽). 이제 하늘의 별이 된 그는 지상의 후손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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