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상의 역사산책 75]평생 양지만 쫓아다닌 친일파 전봉덕의 인생행로
◈ 헌병사령부,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보호하다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탈취한 헌병 대위 김병삼은 필동 헌병사령부로 달렸다.
득의만만한 표정의 김병삼은 스리쿼터에서 내리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우선 안 소위를 의무실로 모셔라"
김병삼은 곧장 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봉덕 부사령관에게 무사히 빼돌렸다고 보고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은 이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파주로 성묘를 가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전봉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의무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안두희는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안 소위~ 큰일을 차질없이 잘 수행했어. 여기서 조용히 쉬고 있으면 일이 저절로 잘 풀릴거야"
이승만이 지시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이 중국군 출신으로 백범과 친하다지? 당장 전봉덕 부사령관을 승진시켜 수사를 맡기시오"
전봉덕은 즉시 백범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첫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헌병사령부에 수감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상당히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할 작정이나 현장에서 판명한 것은 1인 단독 행위인 듯하다"
그는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안두희는 권력의 비호 아래 한국전쟁의 혼란통 속에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백범 암살 당일 분주하게 움직인 헌병사령부의 전봉덕 부사령관과 김병삼 대위는 어떤 인물인가?
◈ 평생 권력의 그늘에 안주한 두 사람의 재미있는 경력
인명사전을 보면,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와 행정과 합격~헌병사령관~국무총리 비서실장~서울변호사회 회장~대한변호사협회 회장~법사학회 회장~헌법개정시안 작성소위원회 위원장만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 근무,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기도 경찰부 수송 보안과장, 김구 암살 당시의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경력은 쏙 빠져 있다.
1981년에 발간한 고희기념논문집을 살펴봐도 해방 후의 경력만 자세히 적혀 있을 뿐 일제시기의 친일 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는 8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전봉덕이 갑자기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2년 4월 귀국했다가 닷새만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서둘러 도망간 것은 그 당시 백범 암살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삼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1967년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출마한 사실도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 지역구에 육군 소장 출신이자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을 출마시키고 목포에 직접 내려와 지원유세를 했었다.
이 선거가 워낙 격전이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여기서 승리한 김대중은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1988년 세상을 떠난 김병삼은 죽기 전 끝내 백범 암살사건의 진상을 안 밝히고 비밀을 무덤에까지 안고 갔다.
◈ 믿었던 일본의 패망…전봉덕, 경찰을 떠나 군대로 피신하다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은 정례회의에서 부하들에게 중대한 사실을 밝혔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항복은 시간문제다. 조선은 불행해질 것이다"
전봉덕 수송 보안과장은 눈앞이 노래졌다.
"일본이 떠나면 우리 친일경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해방이 되자 친일경찰들은 일제히 도망가거나 숨어지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 경찰 수뇌부 대신 일제 때의 친일경찰들로 빈 자리를 메꾸자, 전봉독은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눌러 앉았다.
전봉덕에게 떠나간 일본 대신 미국과 미국이 비호하는 이승만이라는 새 주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제정돼 수사망이 좁혀오자 재빠르게 군대로 도망갔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을 졸업한 뒤 육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발생한 백범 김구 암살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예편을 자청한 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들어간다.
이어 과거를 세탁하자는 의도여서인지 변호사니 대학 강의니 책 저술이니 자문위원이니 여러 일을 하면서 행정이나 학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부터 박정희~전두환 정권 내내 끊임없이 적응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 전봉덕의 맏딸 전혜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살하다
겨우 만 31살의 나이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전봉덕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은 일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데 모두 동의한다.
우울증 외에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사후 1년만에 발간된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신화로 남았다.
독일문학 번역자가 드물던 때라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하인리히 뵐, 에릭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 같은 현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반성 같은 역사의식은 그녀의 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봉덕은 맏딸을 자기와 같은 존재로 키우려 했기 때문에 서울대 법대로 진학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법대를 중퇴하고 돌연 독일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아버지 전봉덕의 존재가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존하고 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는 편이었다.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 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 밑의 심층에 남아 있다"
◈ 백범의 영원한 '비서' 선우진 선생, 한을 못 풀고 서거하다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선생이 타계한 것이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만 4년여를 백범을 곁에서 모셨다.
백범을 수행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왔다.
그가 남긴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풍식 씨가 의자로 때려눕힌 것이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왔고,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을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고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나는 백범 선생의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경교장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이 바로 전봉덕이 보낸 헌병사령부 소속 행동대원들이다.
안두희가 타살되고 전봉덕 마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서 사망했으니 진상은 더더욱 묻힐 수 밖에 없다.
선우진 선생은 회고록 서문에서 옆에서 지켜본 백범 김구의 삶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조국통일에 헌신하신 분이기 이전에 범부를 자처하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검소, 절제를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 자신이 으뜸이 되기보다 나라와 국민을 섬긴 겸손한 분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백범 선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선생의 그러한 면면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백범 선생 시신 앞에서 오열하며 조문하는 시민들
1949년 6월 26일 낮.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탈취한 헌병 대위 김병삼은 필동 헌병사령부로 달렸다.
득의만만한 표정의 김병삼은 스리쿼터에서 내리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우선 안 소위를 의무실로 모셔라"
김병삼은 곧장 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봉덕 부사령관에게 무사히 빼돌렸다고 보고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은 이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파주로 성묘를 가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전봉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의무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안두희는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안 소위~ 큰일을 차질없이 잘 수행했어. 여기서 조용히 쉬고 있으면 일이 저절로 잘 풀릴거야"
일제 때부터 필동에 있던 헌병사령부. 현재는 남산 한옥마을로 변했다. 안두희는 여기서 편안하게 있다가 특무대로 넘어가 칙사 대접을 받는다.
전봉덕은 경무대로 달려가 신성모 국방장관과 신태영 육군 참모차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 전말을 보고했다. 이승만이 지시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이 중국군 출신으로 백범과 친하다지? 당장 전봉덕 부사령관을 승진시켜 수사를 맡기시오"
전봉덕은 즉시 백범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첫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헌병사령부에 수감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상당히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할 작정이나 현장에서 판명한 것은 1인 단독 행위인 듯하다"
그는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안두희는 권력의 비호 아래 한국전쟁의 혼란통 속에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백범 암살 당일 분주하게 움직인 헌병사령부의 전봉덕 부사령관과 김병삼 대위는 어떤 인물인가?
◈ 평생 권력의 그늘에 안주한 두 사람의 재미있는 경력
친일파 전봉덕. 한평생 대일본제국과 역대 독재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렸다.
먼저 전봉덕의 공식 경력을 살펴보자. 인명사전을 보면,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와 행정과 합격~헌병사령관~국무총리 비서실장~서울변호사회 회장~대한변호사협회 회장~법사학회 회장~헌법개정시안 작성소위원회 위원장만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 근무,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기도 경찰부 수송 보안과장, 김구 암살 당시의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경력은 쏙 빠져 있다.
1981년에 발간한 고희기념논문집을 살펴봐도 해방 후의 경력만 자세히 적혀 있을 뿐 일제시기의 친일 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는 8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전봉덕이 갑자기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2년 4월 귀국했다가 닷새만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서둘러 도망간 것은 그 당시 백범 암살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삼도 마찬가지다.
백범 암살사건당시 헌병순찰과장으로 안두희 소위를 구출한 행동대장이었던 김병삼 대위.
공식적인 경력을 보면, 1950년 국방부장관 보좌관, 육군헌병학교 교장, 육군 헌병감, 원호처장, 체신부장관, 호남매일신문 사장 등만 기록돼 있고, 헌병사령부 경력은 쏙 빼놓았다. 재미있는 건 1967년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출마한 사실도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 지역구에 육군 소장 출신이자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을 출마시키고 목포에 직접 내려와 지원유세를 했었다.
이 선거가 워낙 격전이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여기서 승리한 김대중은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1988년 세상을 떠난 김병삼은 죽기 전 끝내 백범 암살사건의 진상을 안 밝히고 비밀을 무덤에까지 안고 갔다.
◈ 믿었던 일본의 패망…전봉덕, 경찰을 떠나 군대로 피신하다
8.15 해방을 맞아 환호하는 시민들. 일본의 패망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8일 경기도 경찰부.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은 정례회의에서 부하들에게 중대한 사실을 밝혔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항복은 시간문제다. 조선은 불행해질 것이다"
전봉덕 수송 보안과장은 눈앞이 노래졌다.
"일본이 떠나면 우리 친일경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해방이 되자 친일경찰들은 일제히 도망가거나 숨어지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 경찰 수뇌부 대신 일제 때의 친일경찰들로 빈 자리를 메꾸자, 전봉독은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눌러 앉았다.
전봉덕에게 떠나간 일본 대신 미국과 미국이 비호하는 이승만이라는 새 주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제정돼 수사망이 좁혀오자 재빠르게 군대로 도망갔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을 졸업한 뒤 육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그의 비호 아래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으로 승진한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추천으로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전봉덕은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을 다루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된다. 이어 발생한 백범 김구 암살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예편을 자청한 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들어간다.
이어 과거를 세탁하자는 의도여서인지 변호사니 대학 강의니 책 저술이니 자문위원이니 여러 일을 하면서 행정이나 학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부터 박정희~전두환 정권 내내 끊임없이 적응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 전봉덕의 맏딸 전혜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살하다
고 전혜린. 현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많이 소개했다.
1965년 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전혜린이 갑자기 자살로 인생을 마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겨우 만 31살의 나이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전봉덕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은 일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데 모두 동의한다.
우울증 외에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사후 1년만에 발간된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신화로 남았다.
독일문학 번역자가 드물던 때라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하인리히 뵐, 에릭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 같은 현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반성 같은 역사의식은 그녀의 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봉덕은 맏딸을 자기와 같은 존재로 키우려 했기 때문에 서울대 법대로 진학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법대를 중퇴하고 돌연 독일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아버지 전봉덕의 존재가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존하고 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는 편이었다.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 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 밑의 심층에 남아 있다"
◈ 백범의 영원한 '비서' 선우진 선생, 한을 못 풀고 서거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지 60주기가 되는 해에 백범 곁으로 떠난 선우진 선생 (사진=정운현 제공)
2009년 5월 17일 전봉덕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선생이 타계한 것이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만 4년여를 백범을 곁에서 모셨다.
백범을 수행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왔다.
그가 남긴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풍식 씨가 의자로 때려눕힌 것이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왔고,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을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고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나는 백범 선생의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경교장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이 바로 전봉덕이 보낸 헌병사령부 소속 행동대원들이다.
안두희가 타살되고 전봉덕 마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서 사망했으니 진상은 더더욱 묻힐 수 밖에 없다.
백범 김구선생 묘소에 바쳐진 친일인명사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친일경찰 출신의 전봉덕은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모두 올라가 있다. 선우진 선생은 회고록 서문에서 옆에서 지켜본 백범 김구의 삶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조국통일에 헌신하신 분이기 이전에 범부를 자처하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검소, 절제를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 자신이 으뜸이 되기보다 나라와 국민을 섬긴 겸손한 분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백범 선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선생의 그러한 면면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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