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얼 골 2015. 9. 21. 15:58

'한불(韓佛) 수교 130년 행사'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파리에 머물던 그는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와 오찬을 마친 뒤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허연 머리칼과 검은 눈썹이 대조를 이뤘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셔 얼굴이 벌겋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한국에서 재벌은 동네북과 같은 처지”라고 말했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한국에서 재벌은 동네북과 같은 처지”라고 말했다. /사진가 이재준
―술을 못합니까? 전혀 뜻밖이군요.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와인 한 잔이 고작입니다. 아버지(고 조중훈 회장)도 술·담배를 못했어요. 아버지는 외국인들과 거래했고 해외 사업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국내 시장이 커지면서 사업을 하자면 정부 사람들도 만나야 합니다. 저녁 자리에 가면 술을 못하니 재미없다고들 했어요. 로비가 필요한 국내 사업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유전적으로 제 아들도 술을 못합니다. 두 딸은 좀 마십니다."

인터뷰는 배석자 없이 진행됐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는 조리 있게 말을 풀어나갔다.

―올해는 장녀 문제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그 사건은 조 회장께 어떤 교훈을 줬겠지요?

"저는 회의 석상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현장을 확인하라고 주문해왔습니다. 딸(조현아 전 부사장)에게는 '객실 서비스에 문제가 있고 해이해졌으니 확인하라'고 했지요. '땅콩 앨러지'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승무원은 '땅콩을 드릴까요?' 물은 뒤 봉지를 뜯어 줘야 합니다. 미리 봉지를 뜯어 갖다 주면 규정에 어긋납니다. 그런 매뉴얼을 태블릿 PC에 담아뒀지만 당시 사무장은 패스워드(암호)도 몰랐습니다. 규정 위반을 지적한 것은 옳습니다. 문제는 딸의 '템퍼(성질)'입니다. 승무원을 내리게 한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었지요."

―조만간 딸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이라고 보도된 적이 있더군요?

"전문성이 있는데 아쉽다고 한 말이 그렇게 보도됐어요. 아직 그런 계획이 없습니다. 재판도 안 끝났고."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특히 높은 자리의 사람은 '품성(品性)'도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요?

"집안에서 엄격한 편입니다. 보수적이고. 이런 말이 변명 같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순간 참지 못해 분별력을 잃은 거지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지금 집에서 쌍둥이 아이를 키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할 기회가 됐을 겁니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배웠을 테고요."

―조 회장께서는 부친 밑에서 일하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부친은 광복 직후 트럭 한 대로 운송업을 시작해 대한항공을 일궈낸 것이지요.

"아버지는 '아는 사업만 하라'고 했습니다. 1970년 개발 성장 시기에 전자업종 진출에 대한 유혹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또 '지고 이겨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은 양보하고 큰 것에서 이기라는 것이죠."

그는 미국에서 공학과 경영을 전공했다. 헬리콥터 운전을 배운 적도 있었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정비와 자재 부문 상무를 맡았고, 1992년(43세) 대한항공 사장에 취임했다.

―회사 경영 방식에서 부친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1세대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지요. 1세대가 성장 위주였다면, 우리 2세대는 이를 기반으로 안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 교육을 받고 좀 더 과학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했던 거죠.."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인터뷰
―업무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 챙기는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임직원들이 몹시 힘들어할 겁니다.

"지금은 회사가 커져 본부장의 책임 경영제로 합니다. 다만 본부장이 보고할 때 정말 알고 하는지 밑에서 써주는 걸로만 하는지 들어보면 압니다. 적당히 하는 사람은 배겨내기 힘들지요(웃음)."

―대한항공을 맡아오면서 최대 고비는 언제였습니까?

"3년마다 비행기 추락 사고가 났습니다. 현장에 나가보면 '3년이 됐으니 사고가 날 때가 돼서 난 것이 아니냐'는 말들을 했어요. 사고 나면 또 보상해주고 이런 식이었어요."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고 있는 겁니다.

"추락 사고가 주기적으로 발생해 대한항공이 문제 많은 항공사로 찍혔을 때죠. 항공사의 안전도는 보험 가입 시 내는 보험료로 알 수 있습니다. 최고의 보험료를 물었어요. 보험사에서는 우리를 받기를 꺼렸고. 지금은 세계 항공사 중에서 보험료가 제일 아래에서 셋째입니다. 외국 항공사 중에는 '대한항공이 어떻게 10년 만에 이렇게 바뀌게 됐느냐'며 사례 연구를 하고 있지요."

―어떻게 극복한 겁니까?

"우리나라는 학연·지연 등 연고(緣故) 때문에 공정한 경쟁과 심사, 평가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항공 안전 문제도 사적(私的)으로 서로 봐주기 때문에 생기죠. 그래서 국내 연줄과 무관한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감독' 역할을 맡겼습니다."

―한·일 월드컵 때의 히딩크처럼 말이죠?

"바로 그거죠. 모든 걸 규정대로 하게 한 겁니다. 가령 비상 상황에서 영어로 관제탑과 교신이 돼야 합니다. 조종사 중에는 '몇 십 년간 비행기를 몰았는데 영어를 못하면 어떤가' 반발했지만, 일정 수준의 영어를 못하면 예외 없이 탈락시켰습니다. 그런 것이 효력을 발휘했던 셈이죠. 주기적으로 발생하던 추락 사고가 없어졌으니까요. 사실 '안전'이니 '사고'니 하는 말을 제 입으로는 좀체 안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 입으로 '안전하다'고 말하면 자만심이 생기고, '사고'라는 말을 꺼내면 재수가 없으니까요."

―대한항공은 전 세계 14위의 대형 항공사로 성장했습니다. 본인의 리더십에 기인한 건가요?

"복합적이지요. 해외여행이 많아져 항공 시장이 커진 게 큰 요인이 됐죠. 직원들 인건비도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건비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습니다. 중국 항공사 등과 가격 경쟁을 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결국 서비스 고급화와 안전도, 세계 도시마다 깔린 우리의 많은 노선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회장께서는 임직원들을 내가 먹여 살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요…, 아니, 같이 먹고살지요."

-생전에 정주영(鄭周永) 회장은 현대 직원들이 자기를 먹여 살린다고 말하더군요.

"공생(共生), 윈윈하는 겁니다. 직원들 것을 빼앗아 저만 호의호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얘기를 할까요. 청와대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동계올림픽 유치 3수(修)를 했을 때 제가 공동 유치위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통상 유치위원장이 계속 조직위원장을 맡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해 반대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진선 조직위원장이 그만둔 뒤 '맡을 사람이 없다'며 요청이 왔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평창올림픽이 실패하면 유치위원장이었던 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제 시간의 90% 이상을 올림픽 조직위에 쏟고 있습니다."

―올림픽 일을 맡아 해보니 기업 경영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정부와 지자체를 상대로 일해야 하니 '시어머니'가 너무 많은 거죠. 책임은 안 지고 권한만 행사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공무원 사회가 경직돼있어요. 일을 진행하려고 하면 '감사에 걸린다' '뭐 때문에 안 된다'는 식으로 답변합니다. 제가 정부에 민원(民願)을 해야 합니까. 올림픽 준비는 시간과의 싸움인데…. 기업에서는 제가 결정해놓고 일을 진행하면서 필요한 절차를 밟았던 것과는 딴판이지요."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뭔가요?

"예산 확보지요. 돈도 써야 될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 타이밍을 놓치면 나중에 돈은 돈대로 들고 올림픽도 망칩니다. 올림픽까지 시간을 맞추려면 설사 약간 낭비가 있어도 감수해야 합니다."

―평창올림픽 예산이 무려 13조원까지 늘어났다는데?

"고속철 건설 등 인프라 예산을 포함해 그렇고, 실제 올림픽에만 쓸 수 있는 예산은 2조원이 약간 넘어요. 그게 10년 전 유치를 시작할 때 세워놓았던 예산입니다. 그때는 어디에 비용이 들지를 정확히 몰랐지요. 가령 설상(雪上) 경기장 설계를 해놓았지만 운영을 해본 적이 없어 국제 시합에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외국 전문가들을 불러와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찮습니다. 그걸 신청하면 '예산에 안 잡혀있다' '왜 경비를 절약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기업 경영을 하는 제가 그걸 더 따지는 사람인데. 줄일 것은 줄여야 하지만 해야 될 것은 해야지요."

―평창올림픽의 성공 여부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겁니까?

"국제 수준에 맞게 경기 운영이 이뤄지고, 관중 동원이 잘되는 겁니다. 베이징에서 2022년 동계올림픽이 열리니까 중국 관중이 많이 올 겁니다. 그렇다 해도 입장료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습니다. 올림픽이 끝나는 날 흑자냐 적자냐 결산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올림픽으로 평창이 알려지고 그 안의 호텔과 음식점이 국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면 끝나고도 관광객들이 다시 올 겁니다. 저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 톱(top) 20'에 평창이 들어가게 한다면 성공했다고 봅니다."

―사진 찍는 취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풍경 사진만 찍습니다. 밝은 풍경만 찍지, 어둡고 우울한 풍경은 찍지 않습니다. 매년 캘린더를 만들어 주위에 돌립니다."

―엣날의 왕(王)이 요즘에는 재벌 회장이라고들 하지요.

"동네북인데요, 뭐. 한국에서는 아무리 돈 많은 재벌이라도 럭셔리하게 살 수가 없어요. 자본주의이면서 자본주의가 아닌 문화가 있는 거죠. 재벌에 대해서는 모든 걸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정해놓고 그 한도에서만 합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습니까?

"일에 몰두합니다. 워커홀릭(workaholic)이지요. 그래야 다른 잡념이 안 생기니까요."

프랑스 파리는 이상(異常) 날씨를 보였다. 비바람이 치다가 해가 쨍쨍 나는 변덕이 하루에도 열댓 번씩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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