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대통령 꿈을 키웠다. 1945년 부산 경남중학교 시절 자신의 장래 희망을 대통령으로 적어낼 만큼 당찼다.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글씨를 써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승만·김구의 강연회를 찾아다니는 ‘정치학도’에 가까웠다. 대학 2학년 그의 인생을 바꿀 운명의 인물을 만난다. 김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 웅변대회에 참가해 외무부 장관상을 받는데 당시 외무부 장관이 그를 정치 세계로 이끈 장택상 전 국무총리였다. 김 전 대통령은 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 장 전 총리 선거운동을 돕는다. 김 전 대통령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들어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북방송을 담당한다. 전쟁 후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관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돌아왔다. 자유당 공천을 받아 25세 나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하고 이후 1960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야당 인사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정 이양 번복 발표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다. 3선 개헌에 반대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1969년 상도동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전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바람을 일으켰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씨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다”고 했지만 한국 정치사의 필생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4년 신민당 당수 경선에 나서 “나는 결코 당수를 하기 위해 나선게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출마했다”며 유신독재와 정면으로 맞섰다. 1979년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가 경찰에 끌려나가는 ‘YH 사건’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1986년 2월5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상임운영위에서 김영삼 의원의 신민당 입당을 보
고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두 김 총재(왼쪽은 김종필 신민주 공화당, 오른쪽은 김영삼 통일 민주당 총재)가 3당 합당 회담을 가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0년 1월 3당 합당을 선언하면서 자신이 싸웠던 독재 세력의 품에 안겼다. 민주자유당 내부에서 ‘노태우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 내각제 개헌을 놓고 내부 투쟁을 벌여 승리했다. 1992년 민자당 후보로 14대 대선에 출마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됐다.
사실상의 첫 민간 대통령이었던 그는 ‘문민정부’임을 내걸고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첫해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했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자신과 가족 재산을 공개해 여론이 지지를 받았다. 북한에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권 초반 대통령 지지율이 90%에 육박했다
1996년은 김 전 대통령에게 환희의 한 해이자 정권 몰락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였다. 대한민국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가입, 아시아에서 일본에서 이어 두번째로 가입했다. 1996년 한총련 사태로 대대적 검거에 나서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김 전 대통령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힘이 빠지면서 우경 본색을 드러냈다. 1996년말 안기부법, 노동법을 날치기 시도하면서 거대한 역풍을 맞았다.
정권 말기는 암울했다. 1997년 1월 한보 철강으로 시작된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12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1998년 2월 24일 라이벌이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으로 물려주고 상도동으로 돌아갔다. 그는 퇴임식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말했다.
퇴임 후 간혹 정치적 발언을 쏟아냈지만 아름다운 여생은 아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쏟아냈다. 김대중 정부가 자신을 뒷조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 뒷조사를 했다면 아마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김대중이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지요. 그러고는 6개월 만에 돌아와서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것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고 막말을 쏟아냈다.
자신이 정계에 입문시킨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난 일색이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일방적 국정 운영의 결과”라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2006년 “외교를 못하고 있다”, “일본이 ‘바보’로 본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2007년 대선에 출마한 자유선진당 전 이회창 총재에 대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고 했다. 아들 현철씨가 18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하자 이명박 전 대통령도 비난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정치적 화해도 시도했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노무현대통령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고, 영결식에도 참석했다. 그해 8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며 “우리가 6대(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관계도 있었지만 경쟁관계에 있었거든요. 애증이 교차하는 겁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에게는 “세상에는 기적도 있다”며 위로했다.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오랜 동지이자 경쟁자와 마지막 순간 화해한 것이다
2012년 8월22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김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상도동을 방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에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박 전 위원장)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