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의 정치 입문은 체육계의 과제를 정치를 통해 해결하려는 의지와 체육인의 지명도를 활용하려는 정치권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정치계의 생리, 지역 민심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초기 체육인들의 정치 도전은 실패로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야구계의 ‘전설’ 고(故) 최동원(2011년 작고)과 축구계의 슈퍼스타 최순호(56)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의 경우를 보자. 최동원은 1991년 부산 서구 광역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1988년 ‘프로야구선수협의회(선수회)’ 창립을 주도한 최동원은 그 해 9월 13일 유성의 온천장호텔에서 열린 비밀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 당선됐다. 한동안 관망하던 구단들은 선수회 해체를 시도했고, 그 결정판이 최동원과 장효조를 핵심으로 하는 롯데와 삼성간 3대4 트레이드였다. 이 와중에서 선수회는 끝내 해체됐다.
고 최동원이 한화 투수코치 시절인 지난 2005년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실의에 잠긴 최동원은 롯데로 복귀해 선수생활을 정리하겠다는 희망마저 좌절되자 1991년 부산광역시의회 선거(서구)를 통한 정치권 진입을 결심했다. 경남고 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당시 거대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의 대표 최고위원이었다. 최동원은 당선에 유리했던 민자당 입당 제안을 뿌리치고 3당 합당을 거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정치인이 지키고 있던 민주당(통칭 꼬마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고 최동원의 1991년 부산광역시의원 선거 포스터. 제공=최동원기념사업회
최동원의 선택은 3당 합당을 심판한다는 명분과 함께 서구에 구덕야구장과 경남고가 속해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외에도 선수회 창립과 이후 구단의 압박 속에서 당시 법무법인 ‘부산’ 대표 변호사로 선수회 자문을 맡았던 문재인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인간적 의리와 신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최순호 부회장은 1995년 민자당 소속으로 충청북도 도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다. 현역 은퇴 후 프랑스 등지에서 축구공부를 하고 돌아와 1994년 봄부터 고향 청주에서 어린이축구교실을 운영하던 최 부회장은 민자당 관계자와 주변 지인의 출마 권유를 받았다.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강원FC 감독 시절인 지난 2011년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팀 상황과 자신의 축구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박진업 기자
최 부회장은 선수 시절부터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도의원 출마와 직접 관련은 없었다. 당시 박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대선 전부터 정치적 갈등을 겪다 김 대통령의 당선 뒤 일본 등 외국을 떠돌고 있을 때였다. 출마를 앞둔 최 부회장은 박 회장과 상의했는데 박 회장은 “정치는 어렵고 힘든 일”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축구를 비롯한 체육 관련 일을 풀려면 정치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최 부회장은 결국 민자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앙당의 지원 속에 친구와 지인, 지역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3개월 가량 선거운동을 했다. 고향 발전과 체육 꿈나무 육성에 기폭제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김종필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민자당을 탈당한 뒤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의 바람이 충청권을 휩쓸 때였다.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2008년 울산 현대미포조선과 수원시청간 내셔널리그 결승 2차전을 지켜보고 있다. 강영조 기자
확고한 정치철학으로 무장해 정치인으로 존재 기반 자체의 이전을 꾀한 것이 아니라 ‘체육계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 한번만 도의원을 하고 축구 지도자로 복귀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중앙정치의 대세와 지역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은 최동원의 경우도 비슷했다. 최동원 역시 삼당통합 이후 민자당의 지역적 기반이 된 부산에서 소수 야당 후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1984 LA올림픽 유도 금메달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하형주(54)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장이 1992년 민자당 비례대표로 부산광역시의원이 됐지만 이후 세차례의 시의원,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낙선과 낙천을 거듭한 것도 같은 흐름으로 읽힌다.
하형주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장(오른쪽)이 2002년 9월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북한 계순희와 함께 최종 성화주자로 선정돼 성화를 들고 트랙을 돌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정치권 입문을 꿈꾼 초기 스포츠 스타들의 한계이자 이들에 대한 당시 유권자의 냉엄한 평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