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20년 동안 비주류 정치인이면서도 국회의장에 당선돼 의회 민주주의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지난 29일 부산 봉생병원 의료원장실에서 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의회가 행정부의 거수기가 되는 것을 막은 데 대해 자부심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 청와대는 정무수석(현기환)을 국회에 보내는가 하면 대통령까지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직권상정을 다각도로 압박했다. 재계와 보수언론 등도 가세했다. 버티기가 힘들지 않았나?
“나는 내가 봐도 특이하다. 평소에는 겸손하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또다른 정의화’가 된다. 올바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강해진다. 그때 청와대의 온갖 압박을 받으면서 ‘이거 어쩌지’ 하는 걱정은커녕 ‘그래! 한번 해봐’라는 심경이었다.”
그는 <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에서 당시에 대해 “나의 입장은 확고했다. ‘정의화’를 ‘불(不)의화’로 성을 바꾸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6년초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했다. 비상사태로 해석한 것은 과한 것 아니었나?
“그렇게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상사태는 아니었으니까 나 역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당시에 북한 등 외부세력의 테러 위협이 실제로 있다고 국정원에서 보고도 했지만, 미래의 위험에 대해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국회 자문 법률회사 두 곳 중 한 곳에서 조건부로 비상사태로 볼 여지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법안의 독소조항을 고치도록 해서 법을 처리했는데 국민의 생명과 직결돼 있기에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장준하 선생은 타살” 용기있는 발언
부산에서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병원 경영자였던 정의화는 김영삼 정권에 의해 발탁돼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그는 20년 동안 정치생활을 하면서도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고 주로 비주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경선 때는 대세를 형성했던 이회창 대신 이수성과 최병렬을 각각 지지했다. 세력이나 힘보다는 대의를 중시하는 반골 기질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도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 때 의문사했던 장준하(1975년 작고) 유골이 묘 이장 과정에서 나왔을 때였다. 머리 뒤쪽에 지름이 6㎝쯤 되는 원형 구멍이 확연했다. 정의화는 트위터에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라는 글을 썼다. 당시 여당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한 발언이었다.
―몇달 뒤면 아마도 대통령이 될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다. 더구나 당시에 19대 국회의 국회의장을 할 마음을 갖고 있었지 않나. 보통은 그런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 것 같은데.
“물론 당시에도 의장에 도전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 유골을 보는 순간 오로지 억울한 죽음을 바로잡아서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우리 당 후보에게 도움이 될 건지 아닌지는 아예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글이 나가자, 정의화 저놈을 죽여야 한다는 등 친박계에서 난리가 났다. 나는 그들에게 ‘박 후보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의화 의원 말대로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말하면 엄청난 지지를 얻을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말했지만 그러지 않더라.”
―최고 권력자와 당 주류에게 찍혔음에도 2014년 국회의장 후보 당 경선에서 친박근혜계가 민 황우여를 101 대 46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이겼다. 공천이나 자리를 얻으려고 권력에 굴종하거나 아부하지 않고도 성공했는데 비결이 뭔가?
“그동안 정치를 하면서 유력자를 쫓아다니지 않았고, 내가 세를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만나거나 한 적이 없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임에도 의사로서나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을까를 생각하면 딱 한가지인 것 같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을 지킨다. 인간이니까 가끔 엇나가기도 하지만, 그러면 다시 조정하고 또 조정해서 바른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이 진심을 알아줘서 보은을 받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진인사 대천명이다.”
 | 2011년 11월22일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이 단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최루탄을 터뜨린 뒤 정의화 당시 국회부의장이 있는 의장석에 최루가루를 뿌리고 있다. 정 당시 국회부의장은 최루가루를 털어낸 뒤 자리를 정돈하고 본회의를 열어 에프티에이 비준안 및 관련 법안을 처리했다. 노컷뉴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정치 인생에서 가장 보람으로 여기는 것은 뭔가?
“정치를 한 것 자체가 내게는 보람인데 그중에서 특히 의미를 찾는다면 대의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는 등 민주주의에 충실했던 점이다. 의회가 행정부의 하수인 즉, 통법부와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게끔 의회 권력을 지킨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내 조상이나 하늘이 나를 일반 의사와 다른 길로 가게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정의화는 선비 집안 가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한말 일제의 단발령을 거부하면서 경남 양산군수 자리를 버린 할아버지, 도쿄에서 검찰시보로 임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해 고향에 학교(웅동고등공민학교)를 세운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컸다. 가문의 조상인 고려말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는 어릴 때부터 그의 롤모델이었다. “중2 때 아버지를 따라 포은 묘를 참배한 뒤부터 그분의 강직함과 기개를 늘 가슴속에 간직했다”고 말했다.
1985년께 집안에서 있었던 호적 사건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개업의였던 형이 그간 모은 돈으로 동방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려고 할 때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정의화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상호신용금고라고 하지만 이게 현대판 고리대금업 아닙니까? 승낙하시면 안 됩니다. 꼭 하시겠다면 제 이름을 호적에서 파내고 하십시오”(<정의화의 아름다운 복수>)라고 그 자리에서 말했다. 상호신용금고 인수는 없던 일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적폐청산을 인적으로 해서는 안 되고, 제도나 관습으로 가야 한다. 또 적폐청산의 목표를 국민통합으로 해야 한다. 목표가 그렇게 되면 방법도 달라질 수 있다. 지난 촛불 때 국민들의 염원이 뭐였나. 공정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런 국민의 뜻을 문재인 대통령이 잘 수렴해서 국민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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