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백선행

얼 골 2018. 1. 28. 14:09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초기, 평양에 백선행(白善行, 1848~1928)이 살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평양에서 백가 성을 가진 과부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여성사업가이자 사회봉사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여장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막혀 있던 시절에 그녀는 어떻게 사회봉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수원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말기는 남존여비 의식이 팽만해 있을 때였다. 그녀는 말과 글을 익힐 수 있는 어떠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가난 탓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집의 딸은 가난한 집안으로 시집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6세 무렵에 안씨 성을 가진 남편을 얻었지만 1년도 못 되어 사별하고 말았다. 더욱이 그녀는 키가 크고 몸집도 떡 벌어진데다 광대뼈까지 툭 튀어나와서 남자들의 관심을 끌 수도 없었다. 막말로 웃음을 팔며 돈을 벌 수도 없었다.

그녀는 슬픔을 딛고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작은 마당에 봉선화를 심었다. 그리고 그 씨를 받아서 장터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질동이를 이고 음식점에 찾아가 음식 찌꺼기를 거둬다 돼지를 먹였고, 남은 찌꺼기는 돼지 키우는 집에 팔았다. 또 삯바느질에 식모 노릇, 청소 따위로 돈 버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정수리에 옹이가 박이고 손바닥은 부르트고 허리가 휘어졌지만, 그녀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말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이렇게 해서 번 돈은 헝겊에 둘둘 싸서 버선목에 넣어 두거나 허리춤에 찼는데, 제법 많아지면 이불 틈새에 끼워 넣거나 삿자리 밑에 깔아 두기도 했다. 은행을 이용하는 일이 흔치 않을 때라서 이런 방법으로 돈을 은밀히 보관했던 것이다.

그녀는 웬만큼 돈을 모으자 맨 먼저 방직사업을 벌였다. 물레와 베틀을 사들이고 목화도 여기저기서 사 모았다.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주, 무명, 삼베를 짜서 내다 팔았다. 직접 생산해서 내다 팔았기에 이익도 그만큼 높았다. 수입 또한 돼지 먹이는 일이나 봉숭아 씨앗을 파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벌인 첫 사업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구두쇠 백과부, 다시 일어서다

백과부는 이런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돈을 모았다. 먹고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에 분 한 번 찍어 바르지 않았으며, 평양 사람들이 곧잘 가는 능라도 놀이 한 번 따라나서지 않았다. ‘구두쇠 백과부’, ‘악바리 과부’로 통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과부의 마음속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어떤 신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지만, 신세를 한탄할 시간도, 외로움을 탈 여가도 없었다. 오직 한길만이 보였다.

백과부의 나이가 50대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현금만 끌어안고 저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땅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주식이나 다른 투자 대상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땅을 사려는 생각은 결코 부동산 투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거금을 주고 산 땅은 모래밭이었다. 사기꾼들에게 걸려든 것이다. 이어 또 다른 협잡꾼이 접근해 왔다. 그리하여 또다시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평양 교외에 있던 만달산의 황무지를 속아서 사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구두쇠 백과부’가 망했다는 소문이 평양 시내에 자자하게 퍼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런 소문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며 사업을 벌여 나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모래밭과 황무지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모래밭에 시멘트 원료가 깔려 있던 것이다.

한 일본 사업가가 평양에 시멘트 공장을 차리려고 시멘트 원료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 사업가는 만달산 모래밭에 시멘트 원료가 무진장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백과부는 그 땅을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사기를 당해 산 땅이어서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백과부는 이 땅을 살 때보다 100배나 많은 값으로 일본 사업가에게 팔아넘겼고, 황무지도 시멘트 공장과 사택 부지로 팔려 나갔다.

이 일을 두고 평양 사람들은 그녀의 철저한 근검절약과 투철한 상업정신을 하늘이 알아 준 것이라고들 수근거렸다. 그녀는 이제 평양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녀를 못생긴 과부라고 깔보지 않았다. 아니 뭇사람들은 그녀 주변에 모여들어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당시 대동군 송사리에는 솔뫼다리가 있었는데, 냇물이 불면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남편의 묘소를 오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회갑을 기념해 거금을 들여 서울의 광교를 그대로 본떠서 그곳에 어엿한 돌다리를 놓게 했다. 이때부터 솔뫼다리는 ‘백과부다리’가 되었고, 그녀의 이름도 착한 행동을 기려 ‘선행(善行)’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과부가 백선행이 된 것이다.

교육과 구빈사업을 벌이다

백선행은 1919년 3·1운동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때 백선행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조만식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평양 시내에 시민집회 장소로 쓸 공회당(公會堂) 건축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돈이 뜻대로 모아지지 않았다. 부립 공회당이 있긴 했지만 일본 사람 집회에만 사용허가를 내주었다.

그러자 백선행은 공회당 건축에 2800원(당시 쌀 한 가마에 5, 6원)을 쾌척하고, 전답 800섬지기를 유지기금으로 내놨다. 그렇게 해서 1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3층 석조건물이 세워졌다. 이 건물을 백선행기념관이라 불렀다.

그 뒤 백선행은 평양 광성소학교, 대동군 창덕소학교, 기백 창덕보통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재단기금으로 논밭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죽기 3년 전에 가난한 여러 친척과 빈민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눠 주었다. 그러나 양손자인 안일성에게는 사치스런 생활태도 때문에 뗏장(조각이 난 땅)만 조금 떼어 주어, 그가 땅을 팔아먹지 못하게 하고 겨우 먹고 살 수 있게만 해 주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백선행의 여러 가지 선행을 보고 그녀에게 표창하려고 했지만, 백선행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일제와 야합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던 백선행을 민족지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백선행이 80세로 죽자, 평양 시민들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회장(사회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의 죽음에 모든 사회 단체가 연합하여 지내는 장사)이 치러졌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각계각층의 인사 1만여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백선행은 이렇게 불행을 딛고 열심히 살았다. 그녀는 인생관이 투철하고 목적이 뚜렷한 상인이자 사업가였다. 그녀는 그렇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녀의 철저한 상인정신과 인간 됨됨이는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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