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정주영 이명박

얼 골 2018. 4. 2. 12:26

이명박 저서 등으로 본 '신화'의 재구성

“강한 자는 우회하지 않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995년에 펴낸 에세이 <신화는 없다>에 남긴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50대 국회의원, 60대에 서울시장과 대통령까지 오르며 ‘샐러리맨 신화’였다.

하지만 70대에 영어(囹圄)의 몸이 된 그는 서울동부구치소(서울 송파구 문정동) 13.07㎡(3.95평) 독거실에 수감돼 사법당국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평소 “부정한 부자보다 깨끗한 가난을 택할 것”(<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147쪽)이라고 자부했던 이 전 대통령이 각종 비리 혐의가 불거지면서 그의 ‘샐러리맨 신화’도 재평가의 길에 놓인 것이다.

과거 ‘현대맨 이명박’이 ‘정치인 이명박’으로 성장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장면들을 통해 ‘이명박의 신화’를 재조명한다. 다만 각 개인의 주관에 의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폭도의 칼에 맞서 홀로 금고 지켜”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에서 중책을 맡게 된 데에는 ‘태국 금고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이 전 대통령도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라고 평가했다.

그의 에세이 <신화는 없다>에 따르면 위장 취업한 인천 지역 폭력배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 전 대통령이 혼자 남아 단도의 위협과 집단 폭행으로부터 금고를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1990년 10월20일부터 이듬해 10월20일까지 방영된 KBS2 TV 드라마 <야망의 세월>(이종수 연출, 나연숙 극본)에도 등장하며 이 전 대통령이 정치인이 되기까지 가장 큰 공로를 한 장면으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에 대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시사저널 기고를 통해 “65년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며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지만 이명박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일뿐이었다”고 밝혔다. 즉 이 전 대통령 혼자만 금고를 지킨 건 아니라는 얘기다.

정 전 명예회장은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에서 중책을 맡게 된 계기에 대해선 “이명박씨는 사실 부지런하고 판단력이 좀 빨랐다. 그런 점이 인정돼 승진도 빨랐다”며 “내가 서울대학 출신의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정 전 명예회장의 2009년 펴낸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도 “해외 건설 책임을 훌륭하게 완수한 사람한테는 어떤 일을 맡겨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129쪽)”며 “우리 그룹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던 사람은 거의 다 ‘현대건설’ 현장 출신(129쪽)”이라고 밝혔다.

◆현대건설 성장에 ‘이명박 매직’ 어디까지

이 전 대통령은 저서에서 현대건설 재직 당시 여러 일화를 통해 기업 성장에 많은 기여를 한 점을 상기시켰다.

에세이 <신화는 없다>에 따르면 중기공장 관리부장 재직 때 정 명예회장을 설득해 아파트 사업을 하도록 해 한국도시개발 주식회사 탄생에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과 둘이서 중동 진출을 적극 모색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건설 임직원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재직 때 동기로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이상백 전 美 벡텔 부사장은 2008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건설에 ‘이명박 신화’는 없었다. 우리가 입사할 때 이미 국내 5대 건설사였다”며 “모든 아이디어, 결단은 정 회장에게서 나왔다. 정 회장이 현대의 리더십 그 자체였고 이 대통령은 스태프 중의 수장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 전 대통령도 정 명예회장의 탁월함은 인정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펴낸 에세이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에서 “정 회장 신화 이면에는 무서우리 만큼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47쪽)”며 “정 회장은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조사 분석과 계산에서 나온 충고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신중히 결정하고 일단 결정하면 강하게 밀어붙였다(47쪽)”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정 명예회장 ‘엇갈린 기억’

이 전 대통령과 정 명예회장의 엇갈린 기억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의 면담을 예로 들 수 있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1990년 10월 고르바초프와 만났다(344쪽) 그 4개월 전 소련 방문 때 대통령의 경제특별보좌관 페트라코프의 요청으로 크렘궁에서 그와 3시간 반 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344쪽) 그때 페트라코프가 다음 소련 방문 때 대통령과의 면담을 만들겠다고 했었고 그래서 그 4개월 후인 10월에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게 된 것이다(344쪽)”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에세이 <신화는 없다>에서 “정 회장은 내가 은밀하게 추진해 오던 북방 진출 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291쪽) 정 회장의 첫 반응은 싱거웠다.(291쪽) 91년 11월 일곱 번째 소련 방문 때였다. 모스크바에 갔더니 그동안 안면을 터둔 사이인 고르바초프의 경제 특보 페트라코프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306쪽) 당신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볼 생각이 없습니까?(307쪽) 고르바초프 대통령 예방은 대성공이었다. 특히 정 회장은 큰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314쪽)”고 기록을 남겼다.

범현대그룹 계열사 전직 고위 임원은 “삼성은 주요 결정을 최고경영자(CEO)가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가신그룹들이 결정하도록 놔둔다”며 “반면 현대는 모든 결정을 CEO가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뛰어난 결정은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 내린다고 느꼈다”며 “현대그룹이 큰 것은 정 명예회장의 공로지 이 전 대통령의 공로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정 명예회장은 1992년 시사저널 기고에서 “사실 이명박씨는 조금 놀랐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을 다 자기하고 의논했는데, 그래서 조금 섭섭한 생각도 있었을 거다”라고 밝혀 이 전 대통령과 경영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한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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