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임술년(壬戌年-1982) 이른봄 본인(本人)은 천태종 남대충 종정예하(天台宗 南大忠 宗正猊下)의 부르심을 받고 총본산구인사(總本山救仁寺)에 내려가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에 대한 세상에 숨겨져 왔던 말씀을 듣고 뜻밖의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광명세계(光明世界)를 보는 듯하였으며 용솟음치는 희열(喜悅)이 강렬하게 가슴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본인의 눈에 비친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의 모습은 우리 범부중생들의 상상의 세계를 초월하여 무어라고 필설(筆舌)로 표현(表現)하기 어려울 만큼 고귀하시고 거룩하신 어른 이셨습니다.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은 능히 이 사바(娑婆)의 말법세상(末法世上)을 구제(救濟)하시고 안녕(安寧)케 하실 불(佛)보살의 화신(化身)임을 이 자리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종정예하(宗正猊下)께서는 수십년 전의 사실(事實)인 이 오도송(悟道頌)을 마치 진언(眞言)을 염송(念誦)하시듯 거침없이 설(說)해 주셨고 본인(本人)은 이를 정성들여 받아 적음으로써 이 귀중(貴重)한 책(冊)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본인(本人)이 처음 종정예하(宗正猊下)께 이 말씀을 듣던 그 자리엔 윤덕산(尹德山) 종회의장 스님과 옛날 대조사(大祖師)님을 시봉(侍奉)하면서 종정예하(宗正猊下)와 함께 오도송(悟道頌)을 들었던 여문성(呂文星)스님이 동석(同席)해 있었으며 두번째 더욱 자세히 말씀을 해주실 때에는 전운덕(田雲德) 총무원장 스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종정예하(宗正猊下)께서는 본인(本人)과 전운덕(田雲德)총무원장 스님, 윤덕산(尹德山) 종회의장 스님. 용월산(龍月山) 스님, 여문성(呂文星) 스님, 고대월(高大月) 스님, 서월궁(徐月宮)스님 등 몇몇 스님을 데리고 삼척에 있는 대조사(大祖師)님의 탄생지(誕生地)와 처음 입산수도(入山修道)하시던 삼태산(三台山) 그 자리까지 답사하시고 "대조사(大祖師)님에 대한 올바른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이대로 세상에 알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기 이전(以前)부터 몇몇 책자에 대조사(大祖師)님의 행적(行蹟)에 대한 일들이 실려 있었으나 철저한 연구와 조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간(發刊)되어 여러가지 의아스러운 점과 잘못 보도된 부분도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에 대한 올바른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이 책(冊)이 발간(發刊)됨으로써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에 관한 체계적연구(體系的硏究)의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며, 또한 본종단교리(本宗團敎理)의 이론적 체계화(理論的 體系化)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도송(悟道頌)의 원문(原文)은 있지만 이의 해설(解說)은 아직 연구(硏究)가 미흡하여 아직 정리된 부분이 거의 없는 상태이며 앞으로 스님들과 학자들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하여 상월대조사(上月大祖師)님의 이해(理解)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보람으로 여길 것이며 강호제현(江湖諸賢)의 지도편달을 바라면서 서문(序文)에 가름하는 바입니다.
정묘년 오월 이십사일 (丁卯年 五月 二十四日) 조명기 박사(趙明基 博士)
一九一一 신해년(辛亥年) 음(陰)11月 28日 강원도(江原道) 삼척군(三陟郡) 노곡면(蘆谷面) 상마읍리(上麻邑里) 봉촌(鳳村)에서 부(父) 박영진씨(朴泳鎭氏)와 모(母) 삼척김씨(三陟金氏) 사이에서 2대 독자(二代獨子)로 탄생(誕生)하셨다.
동년(同年) 음(陰)2월 초순(二月 初旬) 우수(雨水)가 지나고 경칩(驚蟄)의 절후(節候)에 즈음하여 조부(租父)가 재계(齋戒) 중 일야(一夜)에 백발노인(白髮老人)이 나타나서 "저기를 보라" 하기에 하늘을 쳐다보니 넓고 두터운광명(光明)이 비치는 끝에 천악(天樂)이 울리고 수많은 군중(群衆)이 거동(擧動)을하는데 그 중앙(中央)에 연(輦)(가마)을 탄 동자(童子)가 가내(家內)로 들어오매 이를 정성껏 모시는 꿈을 꾸었다. 때를 같이하여 자친(慈親)은 광명(光明)에 싸인 용(龍)이 나타나서 공중(空中)에서 돌다가 다시 그 용(龍)이 불덩어리가 되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치마폭으로 받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만삭(滿朔)이 되니 탄생(誕生) 수일전(數日前)부터 매일같이 공중(空中)에서광(瑞光)이 나타남을 조부(祖父)가 보고 상서(祥瑞)가 있을 것을 말씀하니 가족(家族)들과 인근동리(隣近洞里) 사람들도 공감(共感)하여 소문(所聞)이 자자하였다.
드디어 음(陰)11월(十一月) 28일(二十八日) 칠야(漆夜) 초경(初更) 산모(産母)가 방문(房門) 밖에 나가고 싶었으나 안나가고 참고 있으니 누군가가 끌어내는 것 같아서 마당으로 밀려 나가니 큰 불덩어리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을 보고 까무라쳐 정신(精神)을 차리지 못하였다.
산모(産母)도 모르는 사이에 옥동자(玉童子)를 분만(分娩) 하였다. 고고(呱呱)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눈을 뜨니 갓난 영아가 걸어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산모(産母)가 가는 아기를 급히 잡아서 안고 방에 들어와서보니 그 아이의 두 눈에서 푸르고 맑은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님이 이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한편 기뻐하기도 했으나 술수(術數)로 습득(習得)한 정력(精力)으로 7일(七日) 동안을 기도(祈禱)를 올린 결과 눈에 흐르던 불꽃이 거두어지고 안색(眼色)이 정상화(正常化) 되었다.
그 뒤 이웃사람들에게 애기 낳은 것을 통고(通告)하고 친지(親知)들이 와서 아기를 보고 기상(氣象)이 수웅(秀雄)하고 늠름(凜凜)한 모습이 천하(天下)의 장사(壯士)라고 하였다. 조부(祖父)가 특별히 그의 기품(氣品)이 비범(非凡)함을 알고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여기고 조모(祖母)의 뒷바라지로서 보양(保養)하였다.
一九一五 을묘년(乙卯年) 5세(五歲) 되던 봄에 할아버지가 동리(洞里) 서당(書堂)에 입학(入學)시켰다. 一九一九 기미년(己未年) 9세(九歲)때 하루는 (書堂)서당에서『소학(小學)』을 읽다가 집에 돌아오니 조부(祖父)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동리(洞里)] 사람들까지 모여서 야단이었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생(生)과 사(死)도 알 수 없고 암흑세계(暗黑世界)가 갑자기 닥치는 것 같아서 조 부(祖父) 시신(屍身) 앞에서 일일일야(一日一夜)를 몸부림치며 통곡(痛哭)하였더니 마침내 조부(祖父)가 회생(回生)하여 일개월(一個月) 동안 손잡고 이야기하고 한이불 속에서 같이 자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또 다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으나 이제는 울지도 아니하였다. 9세(九世) 소동(小童)이 냉철한 철인(哲人)이 되어 사람을 생각하고 하늘을 생각하게 되었다. 서당(書堂)에는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으나 그의 생각은 미지(未知)의 세계(世界)를 향하여 자기도 모르게 깊이 뿌리가 내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당(書堂)에서는 훈장(訓長)이 신동(神童) 이라고 불렀다. 一九二三 계해년(癸亥年) 13세(十三歲) 되던 가을까지 한문공부(漢文工夫)를 다 마치었다. 총기(聰氣)가 탁월(卓越)하여 유서(儒書) 사서(四書) 삼경(三涇)을 통효(通曉)하고 한시(漢詩)와 습자(習字)도 능숙(能熟)하였다.
一九二四 갑자년(甲子年) 14세(十四歲) 때에 삼척유지공장(三陟油脂工場)에 취직(就職)하여 세상물정(世上物情)에 접하게 되고 인간생활(人間生活)의 귀취(歸趣)를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돌아가신 조부(祖父)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따라서 인간(人間)은 동일(同一)한데 빈부(貧富)의 차(差), 상하(上下)의 계급(階級)이 왜 있는가하는 회의(懷疑)에 잠기게 되었다.
一九二五 을축년(乙丑年) 15세(十五歲) 되던 여름에 크게 발심(發心)하여 좁쌀 일곱되(七升), 새옹 하나, 바가지 둘, 고추장, 된장 등과 부엌칼 한자루를 가지고 삼태산(三台山)에 들어가서 천류계곡 심소상(川流溪谷 深沼上)에 외나무다리처럼 통나무 두세개를 걸쳐놓고 그 위에 초막(草幕)을 매고 이 나무토막 위에 앉아 부엌칼을 앞에 놓고 불침불식 천수다라니 비주 (不寢不食 千手陀羅尼 秘呪)를 염송(念誦)하며 백일(百日)을 한(限)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였다.
만일 잡념(雜念)이 일어나면 부엌칼로 몸을 찌르고 졸게 되면 소(沼)에 빠지도록 조처한 것이니, 이야말로 생사(生死)를 결(決)하는 정진(精進)이었다. 이 정진기도(精進祈禱)중 여치가 손가락(將指)을 파먹어도 참았다고 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그 흉터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기도(祈禱)중 식사(食事)는 처음은 일일일식(一日一食), 다음은 이일일식(二日一食), 그 다음은 사일일식(四日一食), 나중에는 죽 또는 냉수만 먹고 끝까지 기도(祈禱)를 엄수(嚴修)한 결과 이것을 크게 성취하여 차력술(借力術), 축지법(縮地法), 둔갑술(遁甲術) 등을 체득(體得)하여 자유자제(自由自在)로 행동(行動)하게 되니 환골탈태(換骨奪胎), 심(心)과 신(身)이 완전히 탈진(脫塵)되었다.
一九二六 병인년(丙寅年) 16세(十六歲) 때 수험후(修驗後) 귀가(歸嫁)하여 있다가 조춘일일(早春一日)에 자모(慈母)를 하직(下直)하고 국내 명산대찰(國內名山大刹)의 성지(聖地)를 역방(歷訪)하였다.
소백산(小白山)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금강산(金剛山), 구월산(九月山), 묘향산 보현사(妙香山 普賢寺),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 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 팔공산 은해사(八空山 銀海寺), 오대산 월정사(五臺山 月精寺)등 여러 명승지(名勝地)를 오년(五年)동안 순례(巡禮)하고 영험(靈驗)을 축적(蓄積)하였다.
一九三0 경오년(庚午年) 20세(二十歲)때에 이어서 중국(中國)의 명승성지(名勝聖地)를 편력(遍歷)하였다. 오대산 문수도량(五臺山 文殊道場), 보타락가산 관음영량(普陀洛伽山 觀音靈長), 아미산 보현도량(俄眉山 普賢道場), 청량산 화엄성지(淸?山 華嚴聖地)등 기타명소(其他名所)를 순석(巡錫)한 여력(餘力)으로 북경(北京) 장가구(張家口)를 통해 중국(中國) 서강지역(西彊地域)과 몽고근지(蒙古近地)도 관광(觀光)하고 세계적 안목(世界的眼目)이 확대되어 영감(靈感)이 더욱 충만(充滿)되었다.
一九三六 병자년(丙子年) 26세(二十六歲)에 귀국(歸國)하여 그 동안 쌓은 법력(法力)으로 오로지 중생구제(衆生救濟)에 힘쓰기로 하였다.
빈궁(貧窮)한 사람에게 물자(物資)를 융통(融通)하고 질병(疾病)과 고뇌(苦惱)가 있는 사람에게는 법력(法力)으로써 정신적 위안(精神的 慰安)을 주며, 또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보조_補助)를 겸하였다. 이에 심(心)과 신(身)이 불완전(不完全)한 사람들은 쾌활(快活)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신인(神人)이라 하기도 하고 도인(道人)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오직 보시행동(布施行動)으로서 민중구제(民衆救濟)의 뜻을 품고 강원도(江原道)와 소백산(小白山)을 중심으로 하여 도량(道場)을 삼고 구년(九年) 동안 수도행실(修道行實)만을 일삼았다.
자신(自身)의 도(道)가 충만(充滿)하면 이것이 곧 보시(布施)가 되고 구제(救濟)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一九四五 을유년(乙酉年) 35세(三十五歲) 음 1월 15일(陰 一月十五日) 삼척(三陟)에 역사(力士)와 술객(術客)이 모여 있다는 소위 팔장사(八壯士)집에 당도하니 힘을 겨루고 있는지라 대뜸 달려 있던 철쇄(鐵鎖)를 끊으니 입회인(立會人) 모두가 투항(投降)하였다. 이에 재입산(再入山) 정좌(定座)하여 도행(道行)을 강화하고 제자(弟子)를 교화(敎化)하고자 장사(壯士)집을 원호(援護)하던 민원홍(閔元洪), 민경덕(閔敬德) 두 대학출신(大學出身) 제자(弟子)를 인솔하고 충청북도(忠淸北道)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 백자리(栢子里) 소백산(小白山) 구봉록하(九峯麓下)를 점지(占地)하고 향방(向方)을 결정하였다. 음 1월 16일(陰 一月十六日) 현 구인사(現 救仁寺) 산등 넘어 백자리(栢子里) 여의생(如意生)마을 홍승원씨(洪承元氏)집 방 한간을 빌어 우거(寓居)하면서 즉시 두 민씨(閔氏)와 삼인(三人)이 정좌(鼎坐)허여 철야로 천수다라니경(千手陀羅尼經)을 고성(高聲)으로 합송(合誦)하면서 정진(精進)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수일 후 그때 도우제자(道友弟子)로 두 민씨(閔氏)외에 남익순(南益淳), 홍승원(洪承元)과 그의 부친(父親), 여학봉(呂鶴鳳)과 그의 여(女) 임이행자(任伊行者 十二歲) 등이 집결(集結)되었다. 그해 2월(二月)에 현 구인사지(現 救仁寺地) 중앙(中央)인 법당(法堂)터에 도제(徒弟)들과 합력(合力)하여 손수 정지(整地)를 하고 3월(三月)에 상량(上樑)을 하니 소법당(小法堂) 외에 거실(居室)이 8간(八間), 주방(廚房)이 완공되니 신자(信者)가 모이기 시작하여 5월(五月) 단오일(端午日)에 남신도(男信徒) 8명(八名)이 입사(入舍)함으로써 개관(開館)하게 되었다. 그래서 매년 단오일(端午日)을 救仁寺 개창기념일(開創紀念日)로 정하고 있다. 신도(信徒)들이 지참한 질경이보리죽을 먹고 오년(五年) 동안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도통공부(道通工夫)에 열중하였다. 저녁 6시(六時)에서 다음날 아침 6시(六時까)지 철야정진(徹夜精進)하고 낮에는 8시(八時)에서 11시(十一時)까지 오후(午後)에는 1시(一時)에서 4시(四時)까지 정진(精進) 또 용맹정진(勇猛精進) 연중무휴(年中無休)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습성(習性)이 되었다. 一九五0 경인년(庚寅年) 40세(四十歲) 때에 6.25동란(六.二五 動亂)이 일어나자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피난하여 난민구제(難民救濟)에 주력하였다. 사상적(思想的)으로는 불타정신(佛陀精神)으로 교화(敎化)하고 고난자(苦難者)에게는 몸소 온정(溫情)으로 간호하여 주니 모두 도승(道僧)으로 모시게 되어 신도(信徒)가 따랐다. 동지한천(冬至寒天)에 반년(半年)만에 귀사(歸寺)하니 이미 사원(寺院)은 초사(焦士)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곳에 삼간모옥(三間茅屋)을 손수 재건하고 자신성불(自身成佛)을 위하여 선정(禪定)과 주력(呪力)으로 생명(生命)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다시 시작하여 일초반분(一秒半分)의 휴식(休息)도 없이 가일층 분발(奮發)하였다. 一九五一 신묘년(辛卯年) 41세(四十一歲) 음 11월 28일(陰 十一月 二十八日) 야반(夜半)에 심기(心機)가 우연발동(偶然發動)하여 불(佛)의 화도(化導)를 감수(感受)하고 중생(衆生)의 근기(根機)에 대응(對應)하였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용맹정진(勇猛精進)중 회야(晦夜)에 서광(瑞光)이 중천(仲天)하여 사내(寺內)가 백주(白晝)와 같았다. 동년(同年)에 춘추(春秋) 이회(二回)에 걸쳐서 같은 인시(寅時)에 소백산(小白山)이 두 번 명동(鳴動)하였다. 사승(寺僧)과 사중숙박신도(寺中宿泊信徒)와 부락인(部落人)들까지도 산명(山鳴)을 감득(感得)하고 상서(祥瑞)가 있을 것을 모두 예측(豫測)하기도 하였다. 12월 21일(十二月 二十一日)부터 「우리 공부(工夫)가 가장 깊게 되고 있으니 대중(大衆)은 엄숙(嚴肅)하라. 발소리도 내지 말고 기침소리도 내지 말라. 그리고 나를 보라」고 하니 대중(大衆)은 더욱 정진(精進)하면서 우러러 모셨다. 28일(二十八日) 자정(子正)이 되자 천수경(千手經)을 치는 소리가 달라지고 안광(眼光)이 샛별 같고 행동(行動)하는 것이 평소와는 판연(判然)히 달라졌다. 대중(大衆)은 모두 이상하게 보고 있었으나 무엇인가 모르는 압박감(壓迫感)을 느끼고 있었다.
새벽 3시(三時)에 이르러 벼락같은 소리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외치니 산곡(山谷)은 메아리치고 대중(大衆)은 허공(虛空)에 뜬 기분이었다. "나를 보라"하고는 조사(祖師)가 입을 크게 벌리고 "동천(東天)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일월(日月)이 머리 위에 있으니 천지(天地)가 크게 밝도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내(寺內)에 서광(瑞光)이 응결(凝結)되어 발광체(發光體)를 찾고자 하기도 하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내가 탄생(誕生)했다" 대성(大聲)으로 소리치니 산곡(山谷)이 메아리치고 대중(大衆)은 정신(精神)이 漠漠하였다. 아침 6시(六時)에 전대중 (全大衆)을 집합(集合)시키고 이때부터 삼일삼야(三日三夜)를 한시도 쉬지 않고 현하(懸河) 의 웅변(雄辯)으로 설법(說法)을 하니 모두 침식(寢食)을 잊고 흡수(吸收)되었다. 이 설교(說敎)를 만일 십인(十人)의 학자(學者)가 일개월(一個月)만 필수속기(筆受速記)하 면 훌륭한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이 될 것이라고 대조사(大祖師)께서 말씀하셨다. 이에 종정(宗正) 남대충대종사(南大忠大宗師) 스님의 기억(記憶)에 남은 주요(主要)한 구 절(句節)만을 제시(提示)하면 다음과 같다. 연화극락(蓮花極樂) 다시오니 삼세간이(三世間) 득리(得利)하나 무상법계(無上法界) 제도(濟度)하니 하나되고 셋이되니 장엄법계(莊嚴法界) 실상(實相)이니 무개침상(無蓋寢床) 진귀(珍貴)하니 천상천하(天上天下) 하나되니 묘상각지(妙相覺知) 득세(得勢)하니 면면진상(面面眞相) 보배되나 철따라서 오는정을 삼세천지(三世天地) 불운(佛運)되니 무개일문(無蓋一門) 진행(進行)하니 상하문(上下門)새 재양(再揚)하니 금강문(金剛門)이 천세(千歲)로다 진성호(眞聖號)가 금강(金剛)되니 부처님의 힘이로다. 이상(以上)과 같은 절구(絶句)로서, 이 한구(句) 한구(句) 마다에 대하여 수시간(數時間)씩 설교(說敎)가 있었으니 이것을 삼일삼야(三日三夜)를 계속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그침이 없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게 강설(講說)하였다. 때로는 사언(四言) 또는 팔언(八言)으로 또는 장행(長行)으로 노래처럼 흥겹게 설(說)하기도 하고 만면희색(滿面喜色)으로 춤이라도 둥실둥실 출 기분으로 설(說)하기도 하니 청중(聽衆)들도 환희(歡喜)에 싸여서 몸둘바를 알지 못하고 침식(寢食)조차 잊어버리고 있었고 모두가 운상(雲上)에서 천신(天神)과 같이 유희(遊戱)하는 것과 같이 황홀(恍惚)하였다. 그리고 삼일삼야(三日三夜) 대오법문(大悟法門)을 설(說)한 뒤에도 같은 정진(精進)을 계 속하면서 간간히 대소환희(大笑歡喜)하기도 하였다. 백지(白紙)로 만든 책자(冊子)를 옆에 놓고 무엇인가 몇줄 쓰고 덮어놓고 몇 시간 뒤에 또 쓰고 생각나면 눈감고도 써 모아서 두 터운 한 장책(漢裝冊) 한 권이 되었다. 이 책은 그 뒤에 순경(巡警)이 호구조사(戶口調査)하러 왔다가 가져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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