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산행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제각기 멈출 곳이 있는데 다시 무엇을 다투리요.
▲ 충남 당진에 있는 송익필의묘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운장(雲長)이며, 구봉(龜峯)은 그의 호이다.
어린 시절부터 송익필은 그의 동생 송한필과 함께 기재라고 칭해졌다. 특히 그의 눈빛은 유난히 밝고 강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외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탁월한 인재였지만 초시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하였고,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서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 등과 함께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토정 이지함을 통해서 그와 교류가 있던 서기(徐起)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제갈량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송구봉을 보라. 구봉이 제갈량을 닮은 것이 아니라 제갈량이 그와 흡사하니라.』고 말 할 정도로 지모가 깊어서 남들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하는 계책을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을 자아내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1586년까지 고양의 구봉산 아래에서 문호를 크게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했는데, 이름난 유학자로 알려진 사계 김장생과 김집, 정엽, 서성, 정홍명, 김반 등의 문인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이후 죽은 아버지 송사련의 역모조작 사건이 밝혀지면서 궁지에 몰려, 외롭고 쓸쓸한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정철이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도피 생활을 도왔다. 그러나 이런 생활 중에 형 못지않게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던 동생 한필이 동해의 어느 바닷가 근처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송익필은 동생을 잃은 애통함을 한 편의 시로 달랠 수 밖 에 없었다. 이런 기구한 삶은 그가 1599년 65세의 나이로 충청도 면천(沔川) 김진려의 집에서 운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행히 그의 제자들이 뒷날 송익필의 시문을 모아《구봉집(龜峰集)》을 펴내어 세상에 스승의 면모를 전하였다.
세간에는 이외에도 좀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순신이 십 이삼 세 때 친구들과 돌을 모아놓고 진법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송익필이 그걸 보고 있다가 집에 다녀가라고 했다. 그런데 밤에 송익필의 집에 가보니 방에 누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송익필의 방에서 오직 벽에 걸린 구선도(龜船圖)를 보고 집에 왔다. 후에 이순신이 여수 수사로 와서 소나무를 가지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송익필이 묵언으로 알려준 것이다. 배를 만들었는데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몰라 송익필에게 다시 가서 물었더니 그 구멍이 사청목(巳聽目)이라 했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 한 구멍을 놔둬야 했다.」이순신은 송구봉이 가르쳐준 계책으로 거북선을 만들어 바다를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워 조선의 국운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도 이런 계책을 친구인 송구봉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