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고(故) 조영래 변호사

얼 골 2020. 7. 12. 12:32

 

마흔셋의 짧은 생,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인권 변호의 상징으로, 선·후배 법조인들 사이에는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지금까지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가 있습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신평 / 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 "아주 존경하는 선배였고요...조영래 변호사님은 큰 산과 같았어요...산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지만 이 산이 대단한 산이라는 그런 사실은 알 수가 있었죠. 그 앞에 서면 아주 마음이 편해지고 무엇이라도 그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고 조영래 변호사는 학생 때부터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와 부조리 등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실천가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경기고등학교 시절, 학생들을 이끌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학생운동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때문에 71년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후에는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수배생활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도 조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을 쓰며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이를 계기로 개발과 발전에 소외된 주변 이웃들에게 연민과 자비심을 갖고 사회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특히 수배 기간에는 신분을 숨기고 보일러 기사 등으로 생활하면서 노동자의 삶이 자신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평등사상과 이들이 모두 고귀한 존재라는 생명존중 사상을 깨닫고, 인권 변호사의 길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장기표 / 신문명정책연구원장] : "모든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7년의 짧은 변호사 생활이었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공익 소송의 길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84년 국내 최초 집단공익사건인 망원동 수재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 조기정년철폐 사건 등의 담당 변호사로 대규모 집단 소송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공익 증진에 크게 기여함은 물론, 군사 정권의 폭압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조 변호사의 이러한 활동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천정배 / 前 국회의원·前법무부 장관] : "문제 있던 기업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했는데 이게 사실은 변호사의 관점, 법조계 관점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소송이었죠...한편으로는 굉장히 이상이 높으면서도 현실에 뿌리박는 실천적인 자세, 역량 이것을 전 늘 기억하고 닮으려고..."

 

 

 

 

 

 

[손학규 / 전 민생당 대표] :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나는 문리대에서, 조영래는 법대에서 주도를 하고...대학교 졸업한 후에도 계속 민주화 운동이다, 사회 운동이다 해서 흔히들 민주화 운동 삼총사라는 얘기들을..."

고 조영래 변호사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에 지금은 사라진 서울 봉은사 명성암에 잠시 머물면서 학업에 정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김규칠 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등의 주도로 대학생 수도원을 운영했는데, 박세일 초대 청불회장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며 고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김규칠 / 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 "대학생 수도원에서 내가 운영위원장을 했을 때, 조영래 변호사가 박세일 학생하고 같이 찾아왔어요...와서 같이 살겠다고, 대학생 수도원에서 같이 살면서 공부하겠다고...어떤 사정이 생겼는지 조금 있다가 나갈 수밖에 없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하면서..."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간 도피와 수배생활을 전전할 때도 불교와의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전국을 떠돌던 조 변호사는 오대산 월정사에도 잠시 몸을 피해있었는데 이 때 월정사 조실 탄허스님을 만나 불교 경전과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가운데, 조 변호사가 스님이 없을 때 사찰을 찾은 불자들을 안스럽게 여겨, 그 자리에서 가사와 장삼을 입고 염불을 해줬던 일은 지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조 변호사가 한문과 불교경전 해석에 뛰어났고, 모든 이들을 대할 때 분별없는 평등한 마음가짐을 습관처럼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손학규 / 전 민생당 대표] : "신도가 와서 염불을 해달라고 하는데 마침 스님이 밖에 나가셨어요...조영래가 가만있다가 가사를 입고 머리는 길렀지만 내가 염불해주겠다고 염불을 하는데 그렇게 넉살 좋게 잘 하더라...스님이 안계셔서 그냥 가면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느냐 나라도 해주자 그게 내가 아직도 기억에 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