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의 번성기인 당(唐)나라 때는 여동빈(呂洞賓), 일행선사(一行禪師)등 수많은 인상의 대가가 나왔다.
그중 마의선생(麻衣先生)은 화산(華山)에 석실(石室)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삼베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의선생이
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불렀다 하거니와 그의 수제자인 진박(陳博)이라는 자가 있었다. 진박은 마의선생을 찾아가 스승으
로 모시고 땔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기 10년만에 인상학을 터득하여 전국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한 후 태조는 진박의 소문을 듣고 그를 초치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술을
내렸다. 진박은 야복(野服)차림으로 황제를 알현했었으나 태조가 내리는 벼술을 한사코 사양했었다는 것이다. 송 태조는 진
박의 태도에 감탄하고 그의 아호를 희이(希夷)라 지어 내렸다 한다.
"희이"란 『노자(老子)』에 나오는 글귀를 딴 것으로써 <견이불견왈희(見而不見曰希)요, 문이불문왈이(聞而不聞曰夷)라>의
희(希)자와 이(夷)자를 딴 것이다. 즉 <보여도 보지 않음을 가로되 희(希)라 하고, 들려도 듣지 않음을 일컬어 이(夷)라 한다>
는 뜻에서 딴 것이니 진박의 고상한 인격을 가상히 여겨서 지어준 아호였다는 것이다.
이 희이(진박)의 시대까지는 인상학이 공개되지 않은 채 비전(秘傳)으로 그 제자들에게만 전해지다가 공익(公益)을 위한 것
이라면 구태여 비전할 필요가 없다는 희이의 판단하에 비로소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선가(仙家)는 선가대로, 그리고
불가(佛家)는 불가대로 인상학의 오묘한 진리를 공개했던 것이다. 이것을 모아 『신상전편(神相全篇)』 으로 출간하게 되었
다. 이 <신상전편>이 책으로서 세상에 나온 최초의 인상서이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신상전편>을 입수하여 연구에 골몰했다. 따라서 송나라 때에 이르러 인상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후세인들은 희이선생을 인상학의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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